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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 Oct 14. 2022

대체 퇴사하고 뭘 하셨나요?

잠깐 드리프팅 했습니다.

항해를 하다 보면 가끔씩 바다 한가운데서 엔진도 꺼놓은 상태로 표류하고 있는 선박들이 있다. 배는 움직여야 정상인데 바다 한가운데서 정처 없이 두둥실 떠있기만 하는 게 실습생인 나에겐 이상해 보여 선장님께 여쭤보았다.

  

    - 선장님 저 배는 왜 그냥 가만히 있는 거예요?


    "어- 저 배는 드리프팅 (drifting) 중이라서 그냥 있는 거야."


    - 드리프팅이 뭐예요?

   

    "선박 일정에 변경이 생겼을 때, 다음 스케줄이 확정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바뀐 스케줄에 맞추려고 기다리 는 거야."


    - 그러면 그냥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항해하면서 기다리면 안 되나요?


    " 바보야 그러면 연료가 낭비되잖아. 이렇게 주변 해역이 안전할 때는 드리프팅을 해도 괜찮고 확실하지 않은 스케줄 때문에 연료를 낭비하는 일도 없지. "




내가 탔던 컨테이너선은 일정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실제로 배를 타다 보면 드리프팅을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드리프팅을 한다는 것은 항해를 잠시 멈추는 것이기 때문에 메인 엔진을 꺼놓을 수 있다. 수 십일 동안 부지런히 돌아간 엔진이 항해 중 드디어 멈추는 시간이고 이때 기관부는 필요한 정비도 할 수 있다.  

나에게 '드리프팅'이라고 하면 뭔가 목적이 있는 기다림 같은 느낌이 든다. 분명 배는 항해할 때 가장 가치가 있지만 가끔은 필요에 따라서 이렇게 의도적으로 엔진을 멈추고 드리프팅을 해야 할 때도 있다.


항해사를 그만두고 그동안의 공백 기간을 어떻게 보냈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잠깐 드리프팅했다고 대답하고 싶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입학해서 열심히 공부하며 빡센 학교 생활 속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했고 바로 항해사로 취업해 승선을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는 대기업에 취업했지만 '대마불사'라는 말이 무색하게 입사 1년 만에 회사가 파산하였다. 새로운 회사를 찾고 새로운 시스템에서 또다시 죽어라 일했다.


가장 젊고 화려할 20대의 시간을 바다 위에서만 보낸 것 같다는 아쉬움에 대한 보상심리 그리고 쉼 없이 달려오며 찾아왔던 번아웃 때문에 잠깐 엔진을 멈추고 이제 인생의 새로운 막이 열리기 전, 아마도 나는 스스로 드리프팅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잠깐 엔진을 멈추고 그냥 쉬었다. 해보고 싶었던 것도 마음껏 해보고 나를 돌보고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드리프팅을 한다는 것은 목적이 있는 기다림이기 때문에 드리프팅을 하는 시간이나 기본적인 연료 소비를 낭비라고 말할 수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나처럼 때때로, 사람마다 잠시 쉬어가는 드리프팅이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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