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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남정 Aug 02. 2023

[훔쳐보는 일기] - 먼길을 돌고 돌아

- 박사학위를 받으며

  방송작가아카데미 수업을 들을 때, 내가 첫 과제로 썼던 드라마극본 제목은 <되감긴 비디오테이프>였다.  일상 속 평범한 주부가 가사일과 육아로 지쳐 후줄근해진 상태에서 첫사랑과 마주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드라마는, 그녀의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지금의 남편이 아닌 첫사랑을 선택한 인생이 펼쳐지는 스토리였다. 교수님께 칭찬을 들은 작품이지만 드라마극본 공모에는 탈락했었다.  


  최근에 차를 몰고 가다가 우연히 들은 라디오 프로에서 패널끼리 누군가 시간을 되돌려 준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은지, 그때로 돌아가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만약 나에게 똑같은 질문이 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운전을 하면서 잠시 나의 과거에 대해, 그리고 20년도 훨씬 전에 썼던 내 드라마에 대해 떠올랐던 시간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1도 없다. 상황이 바뀐다고 해서 나아질 것도 없으려니와 상황을 바꾸고 싶은 마음도 없다. 돌이켜보면 세상 일이라는 것이 나쁜 일은 나쁜 일대로 그만한 이유가 다 있었고,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그 과정이 있었다. 사건 사고는 불시에 찾아오지만 그로 인해 더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뜻밖의 요행이 있기도 했지만 찰나에 불과했다. 상황이 나쁘다고 마냥 나쁘지 않았고, 좋다고 마냥 좋은 것도 아닌 게 인생이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게 인생이다. 지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 시간에도 인생은 변곡선을 그리며 흘러간다.


  처음부터 좋은 환경에서 부럽지 않은 교육을 받고 자랐다면 지금의 나와는 또 다른 내가 되어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일찍 출세했고, 더 전문적인 일을 하고 있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든다. 반면 처음부터 좋은 환경에 있었다면 단언컨대 나는 지금의 나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양한 경험으로 쌓은 지혜는 책상머리에서 쌓은 지식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일이며,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수많은 담금질로 단련된 오늘날의 멘탈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약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제때 제대로 받을 수 있었다면 늘 불만과 짜증에 차 있거나 오만에 넘쳐 살았을 것이다. 못 배운 설움을 물려주고 싶지 않으시다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등학교까지는 공부시키겠노라는 부모님의 포부와, 글쓰는 국어선생님이 되려면 대학을 가야한다는 철없는 딸의 욕망은 곳곳에서 부딪쳤고, 늘 어긋났다. 나는 제때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고, 비뚤어진 마음에 비행소녀가 되었다.


  방송대 90학번이지만 대학원은 (20)11학번이다. 비어있는 20여년의 시간동안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둘이나 낳았으며, 독서지도사와 논술지도사, 미술심리치료사를 거쳐 한국어교원자격까지 갖추는 공부를 해왔다.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고, 내가 쓴 시나리오가 (이유나 결과야 어떻든 간에) 두 편이나 영화화되었으며, 영진위 시나리오상을 받기도 했다. 처음에는 내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공부가, 나의 공부DNA를 자극했고, 2023년 8월, 드디어 문학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먼길을 돌고돌아왔지만, 나는 한번도 길을 잃은 적도, 후회한 적도 없다.  


 추신 : 논문 쓰느라 소홀했던 브런치에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다가, 더 좋은 글 힘차게 써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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