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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남정 Apr 29. 2024

[북&무비] 한 사람이 죽고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말리의 일곱 개의 달』 vs  <1987>

스리랑카는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불교계 민족인 싱할라족과 힌두계 민족인 타밀족이 갈등을 빚어온 국가이다. 스리랑카가 영국 식민지배하에 있을 때는 타밀족이, 영국이 물러간 이후에는 싱할라족이 정권을 잡으면서 서로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싱할라족은 1972년 타밀족의 대학 입학을 제한했고, 1997년과 1981년에는 타밀족을 학살하는 사태에 이르기도 했다. 두 민족 간의 불신과 적대감이 극대화된 상황에서 비밀 조직까지 동원해 반체제 인물들에 대한 살인, 납치, 고민 등 인권 침해 행위가 자행되었다. 이 두 민족의 갈등은 2009년까지 이어졌다.     

셰한 카루나탈라카의 『말리의 일곱 개의 달』은 스리랑카의 내전 시기였던 1983년부터 1990년까지 발생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가상의 인물 ‘말리 알메이다’는 우연히 폭동 현장과 학살 현장을 목격하게 되고,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게 되었던 사진작가이며, 떠도는 영혼으로 등장한 것으로 보아 이미 사고사 또는 살해당한 인물이다. 책 제목이기도 한 ‘일곱 개의 달’은 영혼이 빛으로 들어가 다음 생으로 넘어가기까지의 남은 일주일을 의미한다. 즉 말리가 달이 일곱 번 질 때까지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자신의 카메라에 담긴 기록을 현세에 전해주고자 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작가 카루나탈라카는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한국과 스리랑카가 비슷한 비극의 역사를 겪었다는 점을 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은 물론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대한민국에서 희망을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스리랑카의 비극 역시 “언젠가 책에서나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작가는 한국의 일제식민시대와 독립, 전쟁과 분단의 현실을 스리랑카의 역사와 비교했지만 나는 이 책에서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이 떠올랐다.     

 

영화 <1987>은 1979년 쿠데타로 쟁취한 정권의 장기 집권을 저지하고자 1987년 6월 발생한 항쟁에서 희생된 박종철, 이한열 등의 학생 열사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경찰 조사를 받던 대학생이 물고문으로 사망하고, 이를 은폐하려는 정부와 세상에 알리려는 언론과 시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일단 실화를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고, 희생자가 내부 정권에 의한 것이라는 점, 더욱이 무고한 일반의 희생자라는 점, 그들의 희생이 시사하는 바가 진실 규명과 평화라는 점에서 『말리의 일곱 개의 달』과 <1987>은 아프도록 닮았다.     

  


독일의 정치 철학자인 카를 슈미트는 전쟁을 통해 적과 동지를 구분하고 그로 인해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적은 겨뤄보기 전에는 그 힘을 알 수 없다. 따라서 적과의 전쟁을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므로 쉽게 대결하지 않는다. 반면 한 쪽이 일방적인 확신의 힘을 가지고 있는 상태라면, 예를 들면 경찰에게는 미리 정해진 힘이 주어져 있으므로 치안의 대상을 향한 폭력 행사가 자유롭다. 따라서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전쟁으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평화는 영원한 평화가 될 수 없다는 데 있으며, 그로 인한 희생은 적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최근만 해도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분쟁 또는 전쟁이 발발하고 있고, 어김없이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이 이어진다.   

   

치안이 평화를 지켜줄 것이라는 것 역시 망상이다. 치안의 허울을 쓴 폭력은 더욱 교묘한 힘으로 잔인한 희생을 강요한다. ‘말리’가 그랬고, ‘박종철’이 그랬으며, 무고한 소수 민족이 그랬고, 거리로 나온 한국의 대학생들이 그랬다.     

 

 ‘한 사람이 죽고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이 그래야 했고, 스리랑카가 그러할 것이다. 꼭 그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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