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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남정 May 25. 2024

[북&무비] 저주는 저주를 낳는다

《파묘》 vs 『저주토끼』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 용품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가업으로 만든 물건을 개인적인 저주에 사용해서도 안 된다. 

대대로 저주 용품을 만드는 우리 집안의 불문율이다. 

토끼는 단 한 번의 예외였다.”

(정보라, 『저주토끼』, 래빗홀, 2023, 10쪽)    

 


공식적으로는 ‘대장간’이지만 실제로는 저주 용품을 만드는 ‘할아버지 집안’은 천민 취급조차 받지 못하던 집안이었다. 할아버지가 불문율을 깨고 저주 토끼를 만든 것은 그런 자신과 기꺼이 친구가 되어준, “돈 있고 힘 있다고 남한테 함부로 대하지 않고, 동네 사람들 누구한테나 허리 숙여 인사하고 경조사 있다고 하면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도와주시는 분들”(12쪽)의 아들, 즉 할아버지의 유일한 친구를 위해서였다.   

   

한때 일제가 한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우리나라의 산천에 쇠말뚝을 박아 풍수 침략을 했다는 괴담이 전해졌다. 이러한 괴담을 증명이라도 하듯 명산 여기저기서 일제의 소행으로 보이는 쇠말뚝이 발견되기도 했고, 그때마다 괴담의 진위 여부를 놓고 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 영화 《파묘》는 한마디로 이러한 괴담을 바탕에 놓고 지관과 무속인이 힘을 합쳐 쇠말뚝을 제거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스토리였다면 역대 32번째 천만관객영화이자 오컬트 영화로는 최초의 천만관객영화라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는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풍수지리설과 무속행위를 리얼하게 재현함으로써 최고의 흡입력을 자아냈다. 뿐만 아니라 스토리 속의 스토리, 스토리 뒤의 스토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중첩되면서 한낱 개인의 서사를 민족 서사로 과하지 않게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영화는 제목처럼 이장을 위한 파묘와 그에 얽힌 가족사로 진행되는 전반부와, 일종의 크리쳐물로 반전되는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이 영화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물질적으로 대단한 영화를 누리며 사는 가족들에게 내려지는 저주의 형태와, 한 민족을 송두리째 제거하고자 했던 일본의 극악한 저주의 형태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정보라의 『저주토끼』와 그 결이 닮았다.     

 

‘저주토끼’는 할아버지의 유일한 친구였던 아들이 신념을 가지고 하던 일에 거대 기업이 개입하면서 희생당하고 급기야 목숨까지 잃게 되자 할아버지가 거대 기업을 향해 만든 저주 용품이다. 할아버지의 저주로 인해 친구 아들의 상대 기업은 망하고, 그 가족들도 몰살되기에 이른다. 집안의 불문율을 깬 대가로 할아버지는 어떤 죗값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주인공인 ‘나’의 눈에만 나타나 동일한 스토리를 반복해서 들려주는 혼만 남았다. ‘나’는 이미 수백 번을 들어서 다 알고 있는 스토리지만 이미 알고 있다는 게 들통 나면 다시는 할아버지를 볼 수 없을 것 같아 매번 새롭게 듣는 것처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영화 《파묘》에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 혹은 부와 명예를 위해 나라와 동족을 배신한 자에게 내려진 저주는 가족의 불행과 몰살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대가 끊어진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대가 끊어지는 것을 견디기 힘들다기보다 죽음까지 이르는 과정과 그 과정을 함께 겪어야 하는 가족으로서의 고통이 더 큰 저주이다. 정보라의 『저주토끼』에서 정의롭고 정직한 사람을 모함에 빠뜨리고 죽음에 이르도록 한 자에게 내려진 저주의 방식 역시 가족의 몰살이다. 그들은 한결 같이 헛것을 보고 이상 질환이 생겨 시름시름 앓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것은 현대의학으로도, ‘겁나’ 많은 돈으로도, 심지어 세상 모든 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해결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저주이다.      


누군가를 저주한다는 것은 내가 그만한 고통을 받았다는 것이며, 따라서 내가 그에게 내리는 저주는 그를 고통스럽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주는 저주를 낳는다. 나의 고통은 누군가의 저주일 수 있으며 또 누군가의 저주는 다른 누군가의 저주에서 비롯된 것이다. 절대 제거될 수 없도록 몇 겹의 장치로 박제한 쇠말뚝의 저주는 결국 그를 제거하기 위한 한 서린 자들의 저주로 싹이 트고, 그 저주는 또 다른 저주를 꽃피운다. 누군가를, 또 무엇을 저주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향한 저주가 된다. 개인과 개인의, 개인과 국가의, 그리고 국가와 국가의 저주를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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