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은 패러독스 - 6
자유주의 경제학의 시조는 아담 스미스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경제학의 시조는 마르크스이다. 아담스미스가 국부론에서 경제 자유주의, 시장경제주의를 정립하였다면,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사회주의 경제 체제로의 이행을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주요 주장은 두가지이다. 첫째,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삶은 어렵다. 굉장히 열심히 일을 하는데도 잘살지 못하고 점점 가난하게 된다. 그 이유는 자본가들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가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일을 하지 않으면서 모든 이익을 가져가고,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을 하지만, 자본가들에게 자기 몫을 빼앗긴다.
둘째, 노동자들이 자기의 정당한 몫을 챙기기 위해서는 자본가의 것을 뺏어와야 한다. 하지만 자본가는 절대 자기것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하에서의 경제 시스템, 정치 제도는 자본가의 이익을 보호한다. 그래서 정상적으로는 노동자가 자기 몫을 가져갈 수 없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또 혁명을 통해 정치적으로 권력을 잡아서 자본가의 몫을 빼앗아 노동자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위대한 경제학자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경제학의 태두인 아담 스미스만큼, 아니 오히려 아담 스미스보다 더 그 이론의 사회적 파급력이 컸다. 경제사에서 마르크스는 분명 새로운 경제학파를 만든 위대한 학자이다. 그러나 현재 경제학에서 마르크스가 차지하는 부분은 굉장히 적다. 아니 사실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경제학의 기본인 경제원론, 경제학개론, 미시경제학, 거시경제학에서 마르크스 이론에 기반한 내용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현대 경제학자들이 자유주의 경제를 추구하고, 사회주의 경제를 피하기 때문이 아니다. 마르크스 경제학 이론이 가지는 기본적 한계 때문이다. 마르크스 이론은 기본적으로 제로섬 경제를 가정한다. 이 세상이 생산량, 가치가 더 이상 증가되지 않는 제로섬 경제로 보았기에 나온 경제 이론이었다.
제로섬 경제의 논리를 상기해보자. 제로섬 사회에서는 누군가 이익을 얻으면 누군가 손해를 봐야 한다. 누군가 손해를 본다는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가 이익을 본다는 이야기이다.
마르크스가 사회를 관찰하니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하는데도 어렵게 살았다. 사회 전체적으로 부가 증가되고 있다고 하는데 노동자들은 잘살지 못한다. 제로섬 사회에서 자기 몫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더 챙겨가기 때문이다. 사회에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있다. 노동자의 몫을 뺏어가는 사람은 당연히 자본가일 수 밖에 없다. 그럼 노동자가 더 잘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제로섬 사회에서 누군가가 잘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와야 한다. 노동자가 잘살기 위해서는 자본가의 부를 뺏어와야 한다. 자본가를 타도해야 노동자들이 더 잘 살 수 있다. 제로섬 사회를 상정했을 때 노동자들이 잘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담 스미스는 경제를 비제로섬으로 본다. 분업과 전문화를 추구하고, 또 시장을 확대하면 사회 전체적인 생산량이 증가될 것으로 본다. 사회 전체 생산량이 계속 증가하므로 내가 제대로 하기만 하면 잘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올 필요가 없다. 아담스미스의 책 제목은 국부론이다. 어떻게 하면 국가의 부를 증가시킬 수 있는가를 이야기한다. 즉 아담 스미스는 처음부터 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는 비제로섬 사회를 상정한다.
경제학의 주류가 마르크스 경제학이 아니라 아담스미스 경제학인 이유는 경제학자들이 자유를 더 좋아한다거나, 선천적인 시장경제주의자이거나 해서가 아니다. 이 사회, 경제현상을 더 잘 설명해주는 것이 어느 이론이냐의 문제이다. 18세기 이후 지금까지 세계 경제는 계속해서 성장해왔다. 즉, 현대 경제는 비제로섬 사회였다. 그럼 당연히 비제로섬 사회를 상정하는 아담스미스의 시장경제주의가 현실에 맞는다. 경제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는 제로섬 사회를 가정한 마르크스의 이론은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고, 마르크스 이론을 적용한다고 해서 사회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그리고 마르크스 이론은 경제학에서 볼 때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경제학에서 중시하는 요소는 가격, 소득, 환율, 이자율, 통화량, 투자 등이다. 통화량, 이자율을 어떻게 하면 경제가 좋아지는가, 인플레이션율, 실업율은 어느 정도 수준으로 유지해야 할까를 고민한다. 자유주의 사회든, 사회주의 사회든, 민주정이든 왕정이든 독재정이든 그런건 상관없다. 경제학은 과학이다. 민주사회에서는 통화량, 이자율이 중요하고, 공산주의에서는 통화량이 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게 아니다. 어느 사회에서든 통화량, 이자율이 국민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가격, 소득, 환율, 이자율 등 경제적 요소로 사회를 설명하는 것이 경제학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어떻게 하면 모두가 잘사는 사회가 된다고 했는가. 자본가의 부를 노동자들이 가져오면 잘사는 사회가 된다고 했다. 가격, 환율, 이자율 등을 어떻게 조정하는가는 상관없다. 자본가의 부를 뺏어오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가와 노동자를 서로 대립 집단으로 보고 이들간의 상호관계로 사회를 본다. 이건 경제학이 아니다. 정치학이다. 경제적 기반을 중심으로 사회 구성원을 나누고, 그 구성원 사이의 역학 관계로 사회를 설명한다. 경제적 요소보다는 자본가-노동자간 역학 관계로 세상을 본다. 즉 마르크스 경제학은 경제문제를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치학이다. 그래서 마르크스 경제학은 경제학 내에서 정치경제학이라고 불린다. 정통 경제학자들이 마르크스 경제학을 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경제학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정치학이기 때문에 그렇다.
마르크스는 사회 구성원을 자본가와 노동자,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으로 구분했다. 이런 구분은 경제학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정치적으로 볼 때 자본가는 소수이고 노동자는 다수이다. 잘사는 사람은 소수이고 가난한 사람은 다수이다. 1인 1표를 행사하는 민주사회에서 이건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 국회의원,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 노동자 편을 들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잘살게 하겠다고 해야 정치 권력을 얻을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표를 얻어야 하는데, 가난의 이유가 본인때문이라고 하면 표를 얻을 수 없다. 부자들 때문에, 자본가들 때문에 우리들이 잘살지 못한다고 해야 표를 얻을 수 있다. 필자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국민 갈라치기에 있다고 본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항상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구분하고, 이 둘 사이의 갈등을 이야기한다. 문제는 이런 갈등은 아무리 많이 이야기하고 고민한다 해도 해결이 안된다는 점이다.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의 격차가 어느 정도인가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 사회에서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는 항상 존재한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공산주의 사회에서조차 가진자, 가지지 못한자의 구별은 있었다. 가진자, 가지지 못한자의 구별은 영원하다. 이 둘을 구분하고 서로 대립관계로 보면 사회 갈등은 절대 해결되거나 완화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는 위대했다. 어떤 사회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프레임을 만들어냈다. 아무리 사회가 발전해도, 또 가난한 사회이든 부자 나라이든 상관없이 적용할 수 있는 프레임이다. 문제가 해결될 수 없기에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는 프레임이기도 하다.
우리는 경제 문제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실제 경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정치경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구분을 해야 한다. 경제 요소에 초점을 맞추고 경제 이야기를 해야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경제 이야기로 생각하지만 실제 정치경제 이야기를 하면, 특히 있는자와 없는자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하면 논쟁이 잘되고, 맞는말을 하는 것 같은데 실제 문제 해결이 안된다. 정치학을 이야기하면서 경제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마르크스 경제학, 소위 사회주의 경제학은 경제학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정치학이다. 현대 사회의 경제 문제 이슈를 이해하려면 이점은 알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