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교조 국가, 조선
조선조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중국 청나라 군대 45,000명이 조선에 쳐들어왔고, 조선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했다. 조선은 싸울 수 있는 군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청나라 4만 5천명을 막아설 수 없었다. 조선 왕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가려 했으나, 청나라 군사들이 워낙 빨리 이동해 강화도로 가지도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다가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항복하고 만다.
병자호란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전쟁이 아니다. 청나라가 ‘이대로 가면 전쟁이다.’라는 말을 수시로 전했고, 다음에 쳐들어갈 때는 평안도의 산성 등은 무시하고 곧바로 한양으로 진격할거라는 말도 전했다. 10년 전 정묘호란이 있었는데, 그때는 청나라 군사들이 평안도 산성들을 공격했었다. 지금 조선은 평안도 산성에서 전쟁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산성들을 무시하고 바로 한양으로 진격하면 어쩔 것이냐고 미리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들은 정말로 평안도 산성들을 무시하고 바로 한양으로 진격했다. 병자호란은 몇 년 전부터 조선과 청나라 간 전쟁이냐 아니냐로 계속 다투다가 발생한 전쟁이다. 그래서 청나라와 싸워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에 대한 논쟁도 많이 있었다.
전쟁을 앞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조선에도 주전파와 주화파가 있었다. 주화파의 논리는 간단하다. 조선의 군대는 청나라 군대보다 약하므로 싸우면 분명히 진다. 싸워서 이길 수 있다면 싸울 수 있고, 대등한 전투라 해도 싸워볼 수 있다. 하지만 질게 분명한데 어떻게 싸우나. 외교, 화친을 통해 전쟁을 막아야 한다. 청나라는 군신의 예를 요구하고 있다. 싸우면 전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다음 항복해서 군신의 예를 갖춰야 한다. 하지만 미리 화친하면 전쟁으로 인한 피해 없이 군신의 예를 갖추기만 하면 된다. 전쟁이 벌어지면 백성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청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화친해야 한다. 이런 논리는 특별한건 아니다. 어느 나라나 전쟁을 앞두었을 때 나오는 주화파의 논리다. 병자호란 때 대표적인 주화파인 최명길도 대강 이런 논리였다.
이에 대해 주전파의 논리는 보통 이렇다. 싸우면 우리가 질 거라 하는데, 어떻게 싸우지도 않고 그걸 아는가? 우리도 그동안 충분히 준비했다. 제대로, 열심히 싸우면 이길 수 있다. 전쟁에서는 작은 군대가 큰 군대를 물리친 적도 많다. 우리도 적을 이길 수 있다. 설사 지더라도 한동안 버틸 수 있다. 불리하더라도 전쟁을 하다가 협상을 하면 그냥 항복할 때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할 수 있다. 또 싸우지도 않고 그냥 항복하면 상대방으로부터 더 무시만 당한다. 어떻게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할 수 있는가. 최선을 다해 싸워봐야 한다.
보통 이게 주전파의 논리다. ‘열심히 싸우면 이길 수 있다.’ ‘결국 항복하더라도 싸우다 지면 보다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 주전파의 논리는 그게 아니었다. ‘싸우면 이길 수 있다.’ ‘싸우면 보다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낼 수 있다’가 아니었다. 명나라와의 인연을 끊고, 불의한 존재인 청나라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게 주된 이유이다. 싸우면 어떻게 될까? 조선이 분명히 진다. 망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청나라에 항복할 수 없다. 보다 유리한 협상 조건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쁜 오랑캐인 청나라와 협상 자체를 할 수 없다. 유리한 협상이냐 불리한 협상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청나라와 협상은 없다.
그런데 청나라 군대와 싸우다 지면 조선이 완전히 망할 수도 있지 않나? 많은 백성들이 죽어나가지 않나? 이에 대한 주전파의 주장은 이렇다. 조선이 망하는 게 별거냐? 어느 나라든 결국은 다 망한다. 조선이 망하더라도 청나라와 협상은 안 된다. 많은 백성들이 죽을 거라고?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오랑캐 청나라와 협상하여 정의를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백성들이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낫다.
김상헌은 이렇게 말한다. ‘자고로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역을 따를 수는 없다’ ‘도리를 거스르면 살더라도 죽은 것만 못하다. 설령 나라가 망하더라도 지켜야할 가치와 원칙이 있다.’
김상헌 만이 아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홍문관에서는 ‘비록 나라가 망하더라도 우리가 지키려는 것을 오랑캐가 범하게 할 수는 없다’라는 상소를 올렸다. 또 전쟁 중에 대사헌 김수현은 백성들이 어육(魚肉)-제사상에 올리는 고기가 되더라도 항복할 수 없다고 했다.
김상헌이 문제 있는 사람일까? 아니다. 자기가 죽더라도, 자기 집단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가치를 지키려는 건 정말 훌륭한 사람들의 특성이다. 역사에는 이런 위인들의 정말 많이 있다. 그런데 이런 위인들이 활동하고 인정받는 영역은 정해져 있다. 종교 영역이다. 이 분야에서 김상헌 같은 사람은 좋게 말하면 순교자이고, 나쁘게 말하면 광신도이다. 이 분야에서는 자기 목숨,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며 헌신하는 것이 성인으로 인정받는 길이다.
그러나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는 아니다. 장군이 자기 주장만 하다 부하들을 사지에 몰아놓고 패하게 하면 그 장군은 역적 취급을 당한다. 선생이 자기 주장만 하다 학생들을 죽게 하면 그 선생은 아주 나쁜 선생이다. 정의를 추구하다가 백성들을 굶주리고 죽게 만드는 정치인은 나쁜 정치인이다. 자기만 죽으면 모를까, 다른 사람들까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건 어디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단, 종교 집단은 다르다. 사람들을 성전으로 이끌고, 다른 사람들을 희생하더라도 신앙에 충실하다면 종교집단에서는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다. 오히려 더 훌륭한 사람으로 칭송받는다.
김상헌은 종교인 시점으로 보면 참 훌륭한 사람이다. 조선의 문제는 김상헌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정치의 높은 자리들을 차지하고, 국가의 의사결정을 했다는 점이 문제다. 그런 신앙인들은 보통 사회에서는 정치를 담당하는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높은 지위에 올랐다. 한 두 명만이 아니라 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니 ‘국가가 망해 없어지더라도’ ‘백성들이 모두 죽어나가더라도’ 우리는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논리가 국가 의견이 될 수 있었다.
김상헌은 공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또 대사헌도 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예조판서였다. 정권의 핵심인물이다. 그런데 어떻게 ‘국가가 망하더라도, 백성들이 다 죽더라도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람이 계속 정권의 핵심 인물로 승진하고 또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까? 지금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자. 그럼 그 사람이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 다음날로 당장 쫓겨날 것이다. 그런 주장은 종교계라면 모를까 정치, 행정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김상헌은 그런 사고방식으로 그런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했음에도 국가 핵심 지위에 있었다. 오히려 정말로 국가를 위하는 애국자라고 칭송을 받았다. 이건 당시 조선 정부를 구성하는 주요 인물들이 모두 종교계 인물, 종교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좋게 말하면 순교자들, 나쁘게 말하면 광신도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는 거다.
조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조선이 성리학, 주자학의 교조 국가라고 말한다. 그런 말에 동조하고 싶지 않아도, 국가가 망하더라도, 국민들이 모두 죽어 없어지더라도 성리학적 정의를 지켜야 한다는 김상헌 같은 사람들이 크게 활약하고 있는걸 보면 그걸 부정할 수가 없다. 광신도들의 종교 국가. 그게 당시 조선을 설명하는 가장 간단한 말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