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일본을 휩쓴 드라마가 있다. 비방-Vivant라는 드라마다. 넷플릭스에 공개되어 세계적으로도 히트한 드라마다. 이 드라마에 아버지와 아들 관계인 인물들이 나온다. 아들은 정부를 위해 일하는 첩보원이고, 아버지는 개인적인 원한으로 정부 각료를 지낸 인물을 죽이려고 한다. 아들은 정부 첩보원으로서 전임 정부의 각료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는다. 아버지가 전직 각료를 찾아내서 총을 겨누는 순간, 아들 첩보원이 나타난다. 아들 첩보원은 아버지에게 총을 겨눈다. 이대로 물러나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총을 쏘겠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각료를 죽이기 위해 평생을 바쳐왔다. 설사 자기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원수인 각료를 죽이려 한다.
이때 아들은 아버지를 쏘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아버지를 죽여서라도 정부의 명령에 따르면서 각료의 생명을 구해야 할까, 아니면 아버지의 원수이자 자신의 원수이기도 한 각료가 아버지의 손에 죽도록 내버려 두어야할까.
그런데 이 아버지는 자신이 각료를 죽이려 할 때 자식이 나타날 것을 예상하고, 미리 메시지를 남겨둔다. 그 메시지의 주요 내용은 이렇다.
‘내 아들은 나를 선택할지, 아니면 일본을 선택할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만약 아들이 나를 선택한다면, 즉 가족을 위해 일본을 버린다면, 이는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일본 사회의 이익보다 더 중시하는 것으로 앞으로 일본의 장래는 암울할 것이다. 하지만 아들이 나를 버리고 일본을 선택한다면, 자신과 자신의 가족보다 일본을 더 중요시한다면, 일본은 앞으로 다시 일어설 희망이 있다.’
개인의 사사로운 인연보다 국가, 조직을 더 중시해야 한다는 이 입장은 드라마 다른 곳에도 나온다. 이 아들은 자신과 같이 임무를 수행하는 동료들이냐 아니면 아버지냐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아들은 동료들을 버리고 아버지를 선택한다. 이 행위에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실망한다. 아버지를 위해, 즉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일본 정부의 임무와 조직 동료들을 포기하는 것은 옳은 행위가 아니다.
이런 에피소드들을 통해 이 드라마에서 보여주려는 메시지 중 하나는 사람은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보다 일본 국가와 조직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낫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국가와 사회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 가족의 이익을 더 우선하다보니 일본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경쟁력이 떨어진다.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보다 국가, 사회를 더 우선시할 때 일본이 살아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에피소드들을 보면서 일본의 한계를 느낀다. 자신과 가족의 이익보다 국가와 사회,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을 더 우선시하는 사고방식이다. 자기-가족의 이익과 국가-사회의 이익이 충돌할 때 자기-가족의 이익을 희생해서라도 국가-사회의 이익을 보존하려는 사고방식.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보다 사회의 이익을 더 중시하는 것이 사회에 더 낫다고 본다. 사익을 희생하더라도 공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소를 희생해서 대를 살려야 한다는 건 바로 이런 사고방식에서 나온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회는 더 강해질 수 있다.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사회보다 더 경쟁력이 있고, 더 힘 있고 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할 리 없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야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며 살아가기 보다는 정의감으로 살아간다. 재미있는 삶, 즐기는 삶 보다는 옳은 삶, 바람직한 삶을 추구한다. 이런 사회가 더 좋은 사회이고 제대로 된 사회 같다. 하지만, 이런 사회-개인보다 사회를 더 중시하는 사회, 사람들이 옳고 바람직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회가 바로 전체주의 사회이다. 일본은 아직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전체주의 중시의 사회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건 일본만이 아니다. 집단주의적 성향이 강한 중국이나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문화 대혁명에서는 가족, 친구, 이웃들 끼리 서로 고소하는 게 적극적으로 장려되었다. 그동안의 부조리를 뿌리 뽑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한다. 그러니 그동안 잘못해온 주위 사람들을 모조리 색출해서 자아비판 자리에 올려야 한다. 가족이 서로 고발하고,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온 친구를 고소한다. 개인의 사적인 관계보다 사회 정의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래서 중국은 깨끗한 사회, 강한 사회가 되었을까? 이런 사회의 문제는 서로 믿지 못하는 사회가 된다는 점이다. 친한 친구, 이웃이라 해도 언제 자기를 해꼬지할 지 모른다. 가족 조차 믿지 못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서로 믿지 못하고 상호 신뢰가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기 쉬울 리가 없다. 사회 발전도 불가능하다. 후쿠야마의 ‘Trust’에서는 사회 구성원 간 신뢰 정도가 사회 발전 수준을 결정 짓는다고 했다. 친구, 가족을 넘어서 처음 보는 외부인까지 신뢰할 수 있는 사회가 선진 복지사회이다. 그런 신뢰가 없으면 선진적인 제도가 만들어지고 시행될 수 없다.
동양의 고전인 논어의 자로 편을 보면, 섭공이란 사람이 공자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우리 마을에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아버지가 양을 훔쳤는데, 이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신고했다’
사회 정의를 위해서 자기 아버지까지 신고하는 사람이 옳고 바른 사람이라고 보았다. 섭공의 말에 공자는 이렇게 응대했다.
‘우리 마을에서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은 그와 다르다. 아버지가 나쁜 짓을 하면 자식은 숨겨주고, 자식이 나쁜 짓을 하면 아버지는 숨겨준다. 바르다는 것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공자는 사회 정의 수립보다 가족이 서로를 돌보는 것이 더 중요하고, 또 그것이 정의라고 보았다. 이 공자의 말은 공공의 이익보다 사적인 관계가 더 중요한가, 사회 질서 유지보다 가족간 의리가 더 중요한가 등으로 비판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공자가 말하는 사회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최소한 가족, 친한 친구사이에서는 서로를 믿고 맡기고 의지할 수 있는 사회이다. 이런 말이 오랜 고전인 논어에 나와있다는 것은, 이 문제로 고대인들도 굉장히 고민해왔다는 것이고, 이때 가족을 선택하는 게 더 옳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지만 논어에 적혀있다고 해도 그런 사회가 인정된건 아니다. 문화 대혁명에서 보듯이, 가족을 희생해서라도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은 항상 있어왔다. 그리고 그게 더 옳다고 생각하는 사회도 분명 많이 존재해왔고, 아직도 그런 사회를 이상향으로 보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일본 드라마 비반트도 그런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한국은 어떨까? 가족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사회 전체의 공정과 정의를 추구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중시할까? 국가를 위한 정부의 명령이냐, 자기 아버지냐의 비반트의 상황에서 한국 사회는 어떤 행위가 더 맞다고 생각할까?
미국 할리우드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어떤 결론일지 추정하는 건 어렵지 않다. 분명 국가의 명령보다는 자기 아버지를 선택하고 화해하는 것으로 결론지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 정부 측에서도 국가의 명령보다는 자기 아버지를 선택한 조직원을 비난하지 않고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 영국, 프랑스의 영화에서도 비슷한 결론이 나올 것이다. 이런 나라들의 영화에서 자신의 가족을 희생하며 국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주인공은 상상할 수 없다. 중국 영화에서는 가족을 희생해서라도 국가의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이 영웅이 될 것 같다. 한국에서는 어떨까? 이런 내용으로 드라마가 만들어진다면, 한국 영화는 과연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