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따뜻한 이사도씨 Feb 22. 2023

기습이라서 좋았던 적은 없었다, 좋아서 좋았던 거지


예상치 못한 순간, 기습적으로 당하는 키스는 더 달고 짜릿할까?


생각해보면 처음부터가 기습이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돌려 얘기를 하려던 것뿐인데, 어느새 내 얼굴은 상대방에 의해 한껏 꺾여 있었고, 입술도 모두 덮여있었다.


제법 두툼한 내 입술이 그렇게 순식간에 공기를 차단 당했을 때, 나는 놀라기도 했지만 숨이 막혔다.

어릴 때부터 나를 괴롭혔던 비염은 기습 키스를 당하는 순간에도 결코 얌전하지 않았다.


상대가 멋쩍을까 봐 처음에는 그저 숨을 참았다.

그러다 살아야겠기에 ,호흡을 목적으로 입술을 살짝 벌려보았다.


그런 내 입술을 상대는 다시 야무지게 틀어막았다.

상대방의 입장에선 키스, 내 입장에선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자꾸만 차단 당하는 상황이 수분간 이어졌다.


정말 이래저래 죽을 맛이었다.

어쨌거나 생각지도 않았던 첫 키스에 놀랐는지 심장은 바깥으로 뛰쳐 나올 듯 뛰어댔고, 콧구멍만으로는 원하는 만큼의 산소를 들이킬 수 없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내가 내는 신음이 에로틱이 아니라 힘겨움이란 걸 눈치챈 상대방이 그제야 나를 놓아주었다.


살 것 같았다.


그날이 내 기습 키스의 시작이었다.


이후로도 선 키스, 후 고백이 몇 번 더 있었다.

 그동안 상대의 마음을 눈치챈 적이 전혀 없는데, 키스로 알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럴 때면 참 난감했다.

상대방의 마음이 나보다 길고 깊었다 해서, 키스 한 번에 내 마음이 상대방과 같아지는 경우는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기습 키스를 당하자마자 따귀를 날리는 것 역시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일단 나를 좋아해 준다는 자체가 감사해, 감히 뺨을 세차게 내리칠 생각 같은 건 못해봤다.


순간 놀라움에 몸이 굳어 몇 초 간 그대로 있다 슬쩍 밀어내는 정도가 다였다.

그게 긍정의 의미는 아니었는데, 뺨을 때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긍정의 시그널로 받아들이는 이도 있었다.

내 입장에선 제법 오래 알고 지낸 지인, 혹은 동료에 대한 예의였을 뿐인데, 생각해보면 그들은 참 눈치가 없었다.


어쨌거나 키스 후 고백을 받아도, 상대가 갑자기 좋아지는 일은 없었다.

과연 그 마음이 언제부터였을까, 잠시 호기심이 생겨 몇 번 만나본 적은 있으나, 도통 더 이상 마음이 열리지를 않았다.


결국 일주일도 안 돼 관계 단절을 선언했다.


그렇게 그들은 더 이상 내 지인도 동료도 아니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스킨십이나 키스에 대한 이야기가 쉬워졌다.

친구들과 기습 키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친구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누구든 다 그런 식으로 고백을 받아온 줄 알았는데, 실상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 충격받았다.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게 드라마,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지 실제로도 그런 식으로 키스하는 남자가 있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그들 중 몇명은 나에게 부럽다고 했다.


"그럴 필요 없어! 내게 기습 키스를 날린 남자들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과 완전히 다르니까."


진심 어린 대답이었다.


현실 속 대개의 고백 장면이 기습 키스로 시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뭔가 생각이 많아졌다.

으레 모두들 그런 식으로 고백받는다고 여겼을 때는, 다소 불쾌해도 거절로 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 여겼는데..


실은 기습 키스라는 자체가 흔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나자 지금껏 내가 당해온 모든 키스가 성추행처럼 느껴졌다.


고백하던 순간에,그들은 어째서 나에게 조신한 태도로 마음을 전달하지 않았을까?

어쩌자고 다짜고짜 내 입술부터 탐하고 자신의 입술을 들이댔을까?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아니면 나라는 존재가 키스를 마구 날려도 될 만큼 가볍게 느껴져서?


시간이 지날수록 후자일 가능성이 높겠다란 생각이 들었고, 나는 몹시 불쾌해졌다.

그러나 뒤늦게 내 화를 받아줄 상대가 없었다.

관계 단절 선언 후에는 연락 오는 것이 부담스러워 전화번호조차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애꿎게 혼자 성질을 내다가, 문득 아직도 몇개의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휴~ 구차스럽다.


예전에는 드라마나 영화에 기습 키스 장면이 자주 등장했다. 그럴 때면 (쌓아온 서사와 더불어 남자 배우가 멋있게 생겨서인지) 마치 내가 키스를 받는 양 설레곤 했다.


그런데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기습 키스 장면을 도통 볼 수가 없다. 사람들이 더는 기습 키스를 설레는 애정 표현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기습적인 스킨십은 강압적, 폭력적이라는 인식이 생겨 거부감을 가지게 됐다. 한때는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아쉬웠던 적도 있다.


그렇다면 키스하기 전에 늘 허락을 받아야 하나?


분위기를 잡다가 키스를 허락받는 장면을 상상해보니 갑자기 정이 떨어져 혼자 싸늘해진 적도 있다.


내가 좋아하던 기습 키스의 장면은 이러했다.


좋아하는 감정이 폭발하면서 남배우가 여배우를 휙 거칠게 돌려세운다. 커다란 두 손으로 여배우의 얼굴을 감싸 안고 기습 키스를 퍼붓는다.

여배우 역시 그 남배우를 좋아하고 있었기에 갑작스럽기는 해도 그 키스가 싫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기다려왔던 순간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처음에는 남배우를 살짝 밀쳐낸다. 뺨을 때리는 경우도 있다.

남배우는 굴하지 않고 계속 키스를 퍼붓는다.

키스를 받던 여배우는 더이상 거부하기 힘들다는 듯 결국 남배우의 목에 팔을 두른다.

둘은 누구랄 것도 없이 키스에 몰입한다.


이런 장면은 드라마나 영화에 너무 흔했고,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거리며 빠져들 만큼 강렬했다.

장면이 끝나도, 내 속은 꿀물 한 사발 들이켠 것 마냥 달달했고, 가슴은 콩닥거리기 일쑤였다.

그쯤 되면 달달한 연애를 즐기는 게 나인지 그네들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분명 그랬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나 보다.

다시 설레고 싶어서 유튜브에 '기습 키스'를 검색해 몇몇 장면을 봤는데, 더 이상 설레지가 않고 살짝 불편했다.

어느새 나 역시도 기습 키스가 애정 표현이라기보다는,

폭력적 행위라는데 동의하게 되었나 보다.

심지어 잘생긴 남자 배우가 기습적으로 키스를 날리는데도 불편하다.

여자 배우가 좋아하는 마음을 먼저 표현한 경우에만 기습 키스가 설렘으로 다가온다.

밀쳐내는데도 계속해서 들이미는 상황은, 아무리 잘생긴 남자 배우라도 불편하다.

심지어 내 취향으로 생긴 남자 배우인데도 불편하다.


나의 경우를 다시 떠올려본다.

나에게 기습 키스를 날렸던 사람 중에 내 취향으로 생겼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내가 마음속으로 흠모하고 있었던 경우 역시 단 한 번도 없다.

그렇기에 키스를 받는 순간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설레지도 않았다.

폭발할 감정따위는 없었다.

불편함만 있었을 뿐..


기습이라서 좋아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저 좋아하는 사람과 키스해야 좋았다.

그런데도 나에게 기습 키스를 날렸던 이들 중 몇몇은, 여전히 제 버릇 남 못주고, '예전 영화 남자 주인공'에 빙의해 계속해서 기습적으로 여자들의 입술을 훔치고 다닐지 모를 일이다. 좋아하고 있다는 핑계로 말이다.

야!!! 기습 키스라고 다 설레는 거 아니거든?? 좋아야 좋은 거지!!
너 그거 성추행이야, 임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