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문을 붙들고 한참 손인사 나눈 막내는 점점 좁아지고 있는 현관문 틈으로 얼굴을 결사적으로 들이 밀어 연방 손바닥을 흔든다. 문은 다시 열리고 “안 되겠어. 좀 더 아빠 얼굴 봐야겠어”하며 같은 의식(?)을 반복한다.
초등학교 3학년 우리 집 막내, 2호는 아빠 바라기이다. 아직도 두툼한 입술을 쭉 내밀어 내게 뽀뽀해달라고 한다. 그는 남자 아이다. 체구는 이미 6학년이다. 오늘도 내게 '심하게' 뽀뽀를 원하고 있다.
그와 유대감은 서로 개다리춤을 추며 팔의 각도가 얼마만큼 좁아야 함을 논하고, 그가 수시로 창작한 ‘외계어’를 복명복창하며 격렬한 포옹으로 나타난다.
그의 아빠 사랑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기 결정권’에서 나온다. 하루에 시청할 수 있는 영상(유튜브, TV) 시간을 정하고, 안전사고와 관련한 문제는 충분히 설명해 주되, 무엇을 배울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지는 자신이 결정한다.
그의 형이자 첫째 아이 1호는 중증 자폐스펙트럼 발달 장애인이다. 1호는 친구와 함께 노는 게 가장 어려운 아이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이지만 아직 5세 아이다. 그냥 5세 아이가 아닌, 일본 자폐증 장애인 작가 ‘히가시다 나오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장 난 로봇’의 5세 아이. 그의 머릿속에는 팝업 창이 허락 없이 퐁퐁 튀어나오고 있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있으나 ‘따로’였다. 그들의 사잇각은 점점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나는 고객들의 니즈(?)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분주히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중 2호에게 ‘돈 많은 친절한 동네 형’ 역할도 포함되어 있었다.
형과는 다른 길을 가는 2호는 분명 평범한 가정이 누리는 행복을 선사해주고 있다. 그는 갖고 싶은 비싼 축구화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득템 하기 위해 8월부터 내게 밑밥을 깔 줄 알고, 박람회에서 AR 게임을 위해 길게 선 줄을 1시간 넘게 기다려 마침내 해내는 집요함을 발휘하는 여느 초등학생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때 1호에게서 못 찾은 보상 심리로 2호에게 각종 재능 발굴과 계발을 위한 교육법을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그는 학교가 끝나면 각종 학원을 다니고 짜인 학습 매뉴얼을 착실히 이행하는 아이가 될 수도 있었다. 내 욕심과 욕망에 근거해 내 방식대로 그를 만들어 가며.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나는 ‘너무’ 그를 사랑할 뻔했다. 내게 그런 심리는 충분히 예비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1호와의 만남이 내 인생에서‘폭탄’으로 느껴진 때가 있었다. “ 우린 폭탄 맞은 인생이다” 아내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적도 있다. 인생에서 아쉬울 거 없이 커 온 내가 의도치 않게 맞이한 대형 사고라고 생각했으니. 난 그 사고로 정신적 사회적 불구자가 되었다고 절망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 영원한 ‘피터팬’ 1호와 동행은 내가 다르게 변할 수 있는 또 다른 단초였던 것이다. 그와의 ‘여행’은 내게 많은 기회를 선물하고 있다. 소설‘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가 실존적 자아를 찾아 고군분투하듯 나도 한 세계를 깨뜨리고 나오는 투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하는 ‘여행’은 일상 속 동반자로서 여행이고, 국토 여행이었고 책과 글쓰기의 만남이었다.
언젠가 2호와 밀월관계는 끝날 것이다. 2호는 시나브로 단답형 무뚝뚝한 사내로 변신할 것이다. 예정대로 아빠 바라기는 끝날 것이다. 대신 ‘자기 결정권’이 뭔지 아는 건강한 사람이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존 스튜어트 밀’ 말처럼. 내가 그들로부터 얻은 지혜는 그들에게 다시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