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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인 Sep 01. 2022

방문객

머물렀다, 가는 사람

학회장을 나서자마자 따가운 햇살이 이마에 닿았다. 선명한 청색의 수평선을 지나칠 수 없어 굳이 캐리어를 들고 모래사장으로 향했다. 세미정장에 학회 명찰, 캐리어. 누가 봐도 출장을 온 사람. 해운대의 거주민과도, 해수욕하는 관광객과도 섞이지 않는다. 본래 타지에서 방문객 티가 나는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학교 1학년, 친구들과 옷을 맞춰 입고 여행을 할 때 택시 기사로부터 반말로 짜증을 들은 기억 때문일 것이다. 극단적 내향형인 내게는 가끔 오지랖이 넓고 외향적인 어른들이 ‘어디서 왔냐’고 말을 거는 상황도 매우 불편하다. 그렇잖아도 당황하면 거절을 못 하고 따지기를 피곤해하는 성격 덕에 호구 잡히기 딱이다. 굳이 눈에 띄는 방문객이 되어 오지랖이든 바가지든 타겟이 되고 싶지 않았다.


 주는 불편과는 별개로, 출장을 몇 번 겪다보니 캐리어와 가방을 가득 들고 다니는 내 모습에 그리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학생’ 소리와 함께 따라오는 반말을 듣기에는 이제 나이가 좀 들어서 그런가. 관광객보다는 출장객이 덜 만만해보일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있다. 이것들보다도 충분히 섞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덜 신경쓰게 된 것 같다. 이질감을 의식할 때는 내 약점을 그대로 노출하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내가 방문객 내지 관광객이 맞는데 뭐 어쩌란 것인가, 생각하며 뻔뻔하게 다닌다.


또 하나. 내 거점이란 어딘지 희미해졌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연구실이고, 자취방에서 휴식을 하고, 가끔 본가를 간다. 그러나 연구실에서는 매시간 매분마다 ‘퇴근하고 싶다’ ‘졸업하고 싶다’는 염불을 외고, 계약이 4개월 남은 자취방은 꽤나 편하지만 ‘내 집’이라는 표현도 애매하다. 본가에 가면 역시 본가와는 교류가 적을수록 원만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돈을 벌어 원룸보다 더 괜찮은 집을 구하면 마음의 거점이 될까? 매일같이 발을 붙이고 있는 장소라 한들 내가 그곳에 ‘섞여’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서울 도심이나 부산 바다나, 마음 두지 못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뜨내기가 아닌가.

사랑하는 해운대의 수평선

캐리어의 무게로 뒤뚱거리며 모래사장을 가로질렀다. 즐비한 파라솔과 썬베드 사이에 멈췄다. 조금 망설이다 캐리어 위에 걸터앉았다. 나쁘지 않네. 누가 봐도 잠시 머무르다 가는 사람같지만. 어차피 내 앞, 뒤, 양 옆의 당신들도 모두 방문객 아닌가요. 가야할 때가 오면 미련을 가득 안고 뒤돌아야 하지 않나요. 파랑-초록-하양이 번갈아가며 다가오는 이 색채를, 시원하게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넓어지다 못해 푸른 선이 된 공간을 가득 담는다. 바다를 마음에 충만하게 담았는가, 그것은 알 수 없다. 여행이 원래 이런 거지. 돌아서고 나서야 충만했는지 알 수 있는 거지.


원래 바다를 갈 때는 샌들을 갈아 신으려 했으나 타이밍을 놓쳤다. 샌들을 챙겨간 보람도 없이 백사장을 거니는 내내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당연히 모래가 신발에 골고루 들어갔다. 해변에서 털고 왔어야 했는데 역시 타이밍을 놓쳤다. 고운 모래라 걸을 만 해서 그대로 담고 서울로 왔다. 컨버스화가 좀 그렇다. 한 번 신으면 벗기 어렵다. 비닐봉투 안으로 신발을 기울이자 우수수, 모래가 떨어지는 소리는 끝이 없었다. 발볼이 조금이라도 옥죄면 못 견디는 주제에 용케 이 많은 모래를 담고 걸어 다녔다. 사실 조금 더 신발에 담아둬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곱게 마른 모래를 보면 새파란 바다가 다시 생생하게 떠오를 테니까. 세차게 움직이는 바다를 담기에 물성이 없는 마음이란 너무 연약하다. 빠져나갈까 두려운 것은 가득 채워진 기쁨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괜찮아. 분명히 머물렀다. 틈새로 빠져나가도 울지 않기를. 다시 채우고 싶다는 그 미련이 나를 살게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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