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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인 Nov 18. 2022

작별, 선물

연극 <클래스>

연극 <클래스> 진주 작, 이인수 연출


모든 작품에는 작가의 일부가 담겨있다. 작가들은 토해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이야기를 하나씩 품고 있다. 이때 이야기에 나의 무엇을 얼마나 담을지, 어떻게 드러낼지 정해야 한다. <클래스>의 학생 역시 졸업작품에 반드시 자신이 겪은 폭력과 복수를 말하려 한다. 문제는 학생이 희곡의 주인공과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는 점이다.


니가 니 현실에 잡아먹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이야기에 잡아먹혀. 이야기는 끝나도 인생은 안 끝나.


가해자인 언니에게 사과를 받고 싶은지, 죽이고 싶은지, 그저 외면하고 싶은지. 학생도 희곡의 주인공 '나나'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돈다. 선생은 피해자의 독백으로 가득한 희곡을 계속해서 지적한다. 이 희곡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냐는 선생의 질문에도 학생은 답을 거부한다.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고, 어떤 결정을 해야할지 모르는 이 상태 그대로를 쓰면 안되냐고 묻는다. 선생은 반대한다. 인생은 그럴 수 있지만 희곡은 인생이 아니기에 결론이 필요하다.


상처에 머무는 상태는 고통스럽지만 나름의 중독성이 있다. "너는 '언니'의 환상처럼 나나를 가로막고 있다"는 선생의 지적에 학생이 분노할지언정 틀린 말 아니다. 간악한 우리의 마음은 차라리 자책이 편하다는 사실을 빠르게 알아차리고 우리를 자책 속에 머무르게 한다. 복수하고 싶다. 그러나 사실 내 탓이 아닐까. 새로운 사람도 두렵다. 몇 가지 감정을 오가던 희곡이 끝을 맺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학생과 선생이 선생의 스승, 원로교수를 두고 언쟁을 벌인 이후이다. 강의실의 위계에 반역을 저지르고 나서야 학생의 희곡은 선생의 조언대로 어떤 결말을 맞는다.


나나는 끝까지 결정하지 '않는다'. 결정하지 않기를 선택했다. 완결된 희곡의 탄생은 분명 선생의 영향이지만, 모순된 길을 수도 없이 순환했던 학생의 지난한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언니의 결혼 케이크를 만들겠다는 나나에게 환상은 독약을 쥐어줬다. 나나는 두 개의 케이크를 만든다. 둘 중 하나에 독약이 있다. 나나는 두 개의 케이크를 모두 챙기며 문을 나선다. 그리고 환상에게도 똑같은 두 개의 케이크를 건네며 작별을 고한다. 이제 사라져 달라. 그래도 혼자였던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웠다. 환상이 어느 쪽을 먹었는지 나나는 확인하지 않고 집을 떠났다. 진짜 언니에게도 어느 케이크를 건넬지 결정하지 않았다. 이제 나나에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랫집 사람과의 약속에 늦지 않는 일이다.


나를 끈질기게 가두던 '나'에게 "그래도 고마웠다"는 인사를 건넬 수 있을 때. '나'가 정말 사라졌는지는 더 이상 중요치 않을 때. 우리는 그토록 미워했던 '나'와 작별할 수 있다.


221028 두산아트센터


한 번 찢어져 버린 영혼은 아물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내 속에서 빛나는 작은 불빛으로 노래할 것이다. 그 노래는 찢어진 영혼의 틈새로 새어 나온다. 이제 그 상처는 나의 입이다.


희곡을 완성한 학생 역시 선생에게 케이크를 두고 간다. 학생과 선생이 동시에 찾고 있던, 원로교수에 대한 '위험한 질문'의 답과 함께. 때로는 맥주와 디저트로, 때로는 수 km의 밤산책으로 함께하며 선생은 진심으로 학생을 이끌어주고자 했다. 선생과 학생의 첫 만남에서도 둘은 예술계의 미투운동을 두고 뜻이 통하는 대화를 나눴다. "그게 폭력인 줄 몰랐다고 폭력이 아닌게 되겠어?"라며 위계에 의한 폭력을 비판하던 선생은, 슬프게도 원로교수의 일 앞에서 방향을 바꿨다. 원로교수가 화두로 떠오르자 선생과 학생의 위계, 그리고 세대는 넘을 수 없는 경계가 됐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그런 분'이 아니야." 선생은 '나나'의 환상처럼 학생을 통제하는 동시에 보호하고 다독였다. 분명 선생은 학생에게 고마운 스승으로 남겠지만, 다시는 예전처럼 선생과 마주앉아 케이크를 먹을 수는 없다. 극의 마지막에 진실과 함께 남겨진 선생과 원로교수 역시 그럴 것이다.


우리는 상처를 치유할 방법을 찾아 헤맨다. 물질, 사람, 예술까지. 애를 써도 아물지 않는 상처를 보며 스스로의 회복력을 탓한다. 어느 생물도 원형대로 살지 않는데 왜 우리는 상처를 감추려 급급해야 할까. 찢어진 상처는 세상과 통하는 창이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노래가 다시 너의 상처로 흘러가서, 너와 내 안에 같은 빛이 채진다. 그 때가 되면 아물지 않은 상처에 감사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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