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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인 Apr 12. 2023

가해자의 얼굴

천인공노할 사건, 그 다음

나는 아동 피해사고가 매번 "어른이 미안해"라는 표현과 함께 확산되는 현상이 불편하다. 정확히는 "천인공노할 사건"의 확산 방식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어떤 불편함이 샘솟는다.


이런 식의 애도는 몇가지 전제 위에서 생성되는데

1. 피해자의 무결함에 일말의 여지가 없고

2. 가해자와 나의 분리가 완벽한 경우.


원론적으로는, 상식적 인간에게 음주운전 가해자 완벽히 분리된 인간이어야 맞다. 그러나 세상에는 비상식에 살짝 발을 걸친 인간이 더욱 많다. 대낮에+음주운전으로+인도를 침범해서+초등생을 친 것은 만장일치의 비상식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새벽에 맥주 한잔 하고 10분 운전하는 정도가 본인의 "상식" 허용범위에 있다.


이와 같은 완벽한 비상식의 사고 발생 후 "어른이 미안하다"며 가해자와 나머지 "어른들"을 완벽히 분리할 때, 언제든 사고를 낼 수 있는 "가벼운" 음주운전자들은 "미안한 어른들"의 범주로 은근슬쩍 편입한다. 물론 그들의 발화가 음주운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기를 바라고. 그러나 동시에, "극악무도한 아동 살인마" 주변에, "일반 어른"의 경계에 존재하는, 뿌리깊은 문화에 대한 성찰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불편함은 3년 전 N번방 사건에서 느낀 감각과도 비슷하다. N번방 가해자에 대한 강력처벌을 촉구하는 청원은 1200만 명이 넘는 동의를 얻었다. 불법 촬영으로 구성된 '국산 야동'을 소비하고, 성폭력 신고에 대한 무고죄 강화를 주장하고, 여성가족부 폐지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도 이 1200만 명에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조금 더 확장해보자. SPC 산업사고, 조두순 사건, N번방...  모두가 분노하는 사건 위로 쌓이는 분노는 때때로 그 사건의 토양이 되어준 수많은 선행사건, 그리고 답습되는 후속 사건을 가린다. 이 가림막은 "죽일 놈들"과 "나"를 깔끔하게 분리할수록 공고해진다. 피해자다운 피해자, 가해자다운 가해자가 만장일치로 가결될 때만 불타오르는 정의감은 주류의 승인 위에 세워진다.


하지만 사건의 공론화가 가지는 의무는 일상의 이면을 폭로하는 일이다. 그 일상의 이면에는 때로 주류에 반하는 지점이 존재하며, 더욱 중요한 것은, "죽일 놈들""나" 사이 공백에 숨어있던 경계의 스펙트럼을 발견하게 한다. 상식이 있다면 죽일 놈들을 옹호하지 못하지만, 그보다 조금 가벼운 가해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것이다.


N번방에 분노하면서도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피해자의 메신저 내역을 보며 "역시 정치적 음모"라며 손가락질하기는 쉽고, 신당역 스토킹 살인에 "성별을 떠나"라는 말을 얹기는 그보다 더 쉽다. 그렇다면 이 모호한 연결선의 어디쯤에 가위질을 하고 "나"를 지켜낼 것인가. 그것을 결정해야 한다. 죽일 놈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그들을 탄생시키고 떠받치는 얼굴들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쩌면 내 안에 존재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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