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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인 Mar 01. 2023

어떤 이름으로, 어디로

어정쩡한 걸음

어떻게 살지, 어떤 선택을 할지


침묵이 길었다.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나'를 말했던 2022년의 가을과 겨울이었지만, 아무래도 말하고 쓰는 방법을 잊은 것 같다.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혔던 취업준비의 시기가 지나갔다. 숨은 쉬며 보냈다, 당연하게도. 압축된 실패를 겪어야 하는 구직활동이 끔찍이 싫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살아있다면 죽음의 위기를 벗어났다는 일종의 무용담을 간직하게 될 줄 알았다. 사회화된-순응적인-쓸모있는 인간임을 입증하기. 분명 유쾌한 구석이 없지만은, 멀리서 보았기에 더욱 거대하고 두려워 보였던 것 같다.


-이렇게 꼰대처럼 담담한 후일담을 말하기까지, 밤을 지새운 수많은 나날과 여러 통의 신경안정제가 필요했다.

어쨌거나 내가 아는 것은, 숨을 참아도 밤의 시간은 흘러간다는 것. 밤과 아침 사이 어스름에 나를 가두고 싶더라도, 결국에는 문을 열고 나가야 한다는 것.


취업의 '뽕'을 누릴 새도 없이 걱정이 앞섰다. 나는 근 3년 동안 락토오보 채식을 이어온 비건지향인이자, 여성학과 동양철학, 소수자 인권이 주 관심사이며, 그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신체적으로는 또 어떤가. 짧은 머리를 한 여성이고, 반 년쯤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있으며, 심한 빈혈로 채용검진 재검사 판정을 받았다. 어쩜 이렇게 회사에서 밝힐 수 없는 정보로 인간이 구성되어 있는지. 대부분은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으면 해결된다. 그러나 한 가지, 채식의 지속여부를 두고는 빠른 결정을 내려야 했다.


본래 직장 생활에서 채식의 지속 가능성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회사 다니면 고기를 먹어야겠거니,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나 3년간 입에 대지 않았던 고기가 새삼스레 당기지는 않았다. 구내식당 반찬에서 육류를 뺄 수 있으면 빼고, 섞여있는 육류는 적당히 먹었다. 첫 동기모임에서는 눈치를 보며 '치킨' 몇 조각을 집어먹었다. 채식을 한 뒤로 '고기' 본연의 맛이 강한 음식은 쉽게 삼키지 못했다. 치킨까지는 구역감 없이 씹어넘길 수 있음을 알고, 문득 오래된 유혹이 올라왔다. 이대로 다시 고기를 먹을까? 채식은 오랜 친구들과 식사할 때, 집에서 혼자 먹을 때 하면 되잖아.


윗사람들에게는 채식을 숨기며, 동기들에게는 육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둘러대며 애매한 한 달을 보냈다. 나는 고기를 먹게 되면 대단히 불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육류 섭취는 생각보다 편하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나름대로 지속가능한 채식을 한다고 해왔으나, 알게 모르게 피로가 누적되었던 것 같다.


식사장소를 정할 때마다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된다.
낯선 사람들에게 양해부터 구하지 않아도 된다.
구구절절 채식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채식의 이유를 들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지, 뭘 더 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결론적으로 나는 팀원들에게 나의 채식을 알렸다. 뚜렷한 계기는 없다. 팀장님과 점심식사를 할 때, 차마 빼지 못하고 담아온 생선구이 때문이었나. 생선의 살 몇 점을 파먹으니 본래 비늘이 자리했을 껍질과 흘러나온 핏물이 눈에 띄었다. 간만에 '먹을 수 없다'는 감각을 느꼈다. 비인간 동물에 대한 책임감보다 가까운 이야기를 해보자면, 미래의 채식인 동지에게 길을 터주고 싶었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근데 직장 다니면 어쩔 수 없어.


어느 날에, 나보다 젊은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건네는 장면을 상상하니 착잡했다.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그 지점까지 내가 있었나. 떳떳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밤과 아침 사이 어스름에 나를 가두고 싶더라도
결국에는 문을 열고 나가야 한다는 것.
어두운 밤에도 빛은 있고

탄탄하게 다져진 길에서도 신경안정제를 찾는 주제에, 나는 굳이 울창한 풀숲에 발을 들인다. 일신의 안락만을 좇으면서는 살아지지가 않는다고. 이리 비장하게 말하지만 나도 이 보수적인 업계에서 먹고 살아야 하므로, 20대 초반처럼 패기 넘치게 살 수는 없다. 의미가 있을지 모르는 어정쩡한 행위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확실함에서 배양되는 것은 많지 않다. 늘 애매하지, 늘 불확실하고 어정쩡해.


의미는 간헐적으로 발견된다. 멀리서 보았기에 거대하고 두려운 것은 취업의 문턱만이 아니었다. 덜덜 떨며 '회식에서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사실을 전한 날, 파트장님에게 '말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을 때. 구내 간편식 코너에서 비건 옵션의 존재를 발견했을 때. 나보다 더욱 캄캄한 어둠에서 길을 터준-비켜준 이들에게 닿지 않을 인사를 전했다. 항상 흔들리겠지만 계속 가보겠습니다.


길은 앞으로 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뒤돌아보았을 때 다져진 경계, 그것을 나의 길이라 하더라.


어떻게 살지, 어떤 선택을 할지,
어떤 이름으로, 어디로 향할지
전부 네 몫의 결정, 다만 기억해
더 쉬운 길은 늘 잘못된 길.

- 뮤지컬 <모차르트>, '쉬운 길은 잘못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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