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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인 Apr 10. 2022

보통의 길

있다가도 없는 길

지하철 노약자석에 처음 앉아봤다. 노약자석마저 다 차있다면 바닥에라도 앉으려 했다. 양심과 원리원칙을 빼면 남는 게 없는 나라서, 젊은 사람이 노약자석에 앉아있는 이 상황이 양심에 찔렸다. 그러나 '노'는 아니어도 '약'은 확실했다. 자취방에서 홍대입구역, 1시간쯤 잡고 느긋하게 걸어가려면 갈 수도 있는 이 근거리가 이렇게 힘겨워본 적이 없었다.


1차, 2차 코로나 백신을 맞을 때는 왼팔의 근육통 외에는 이렇다 할 부작용이 없었다. 그래서 3차도 크게 다르지 않을거라 생각하고 백신을 맞은 뒤에도 일상생활을 했다. 그리고 어제 충분히 안정을 취하지 않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3차 백신의 특성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집에 있을 때는 일상적인 약간의 두통 외에는 문제가 없어서 몰랐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 계단과 오르막을 몇개 거치고 나니 눈앞이 아득해지고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서 도저히 서있을 수가 없었다. 사실 낯선 감각은 아니고, 고등학교 시절 연에 두어번은 꾸준히 겪었다. 컨디션이 조금 안 좋은 날에 샤워를 오래 하면 랜덤하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기대앉거나 누워있다보면 가라앉아서 나중에는 별로 놀라지 않고 자가치유를 했다. 아마 고질적인 저혈압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어쩐지 어제 백신을 맞은 의원에서 혈압을 재고 받은 수치가 걸리더라. 100/51이다. 좀 낮은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며 찾아본 정상수치는 120/80. 지금도 저혈압이 원인인지는 모른다만 누워있어야 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연구실 가는 샛길. 등산로 비스무리한 경사.

오늘 걸어다닌 길은 눈을 감고도 다닐 수 있는 길이고, 아주 일상적인 수준의 운동량이다. 그렇지만 평소에는 크게 느껴지지 않았던 곳곳의 약한 경사로 숨이 가빴으며 지하철역 출구에도 에스컬레이터가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려 해도 오후 5시 30분의 홍대입구역, 쏟아져 나오는 사람 틈에서 내 페이스대로 계단을 오를 수는 없었다. 결국 조금 쉬고 나면 괜찮겠지, 라는 안이함을 비웃듯 간신히 접선한 친구에게 기대어 30분쯤 앉아있고 나서야 잠시 걸어서 택시를 탈 만한 상태가 되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뻗어서는 멍하니 생각했다. 2년 전쯤 생리통으로 걸을 수가 없었던 날에도 5분 거리의 지하도를 건너기 위해 몇 번이나 멈추고 주저앉았다. 내게는 길을 걷기 힘든 날이 어쩌다 하루이지만 나보다 더 몸이 약한 사람들, 혹은 목발이나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평지가 없는 캠퍼스와 계단으로 가득한 지하철은 항상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 길이다. 종종 배리어프리가 접근의 가능여부만을 두고 판단된다. 지금도 엘리베이터나 경사로가 없는게 아닌데 굳이, 리프트 있으면 됐지 굳이, 공사하려면 다같이 불편한데 굳이. '굳이' 하는 시위나 공사로 인한 단기적 불편, 그 이상의 불편을 매일 감수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역 이동권 시위를 두고 '시민들의 이동을 볼모잡는 장애인' 프레임으로 혐오정치를 일삼는 스피커들이 있다. 정상신체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사람만을 '시민'에 포함하겠다는 당당한 선언이다. 장애인 혐오를 지적할 때 너는 후천적 장애인이 될 일이 없을 것 같냐는 질문을 즐겨 사용하지는 않는다. 공감과 연대의 가능성이 당사자성의 가능성을 전제해야만 승인되는 설득구조를 경계하고 싶다. 그러나 파이담론을 파훼하는 목적으로 잠시 당사자성의 설득도구를 빌려오려 한다. 소수자를 위한 안전장치들이 내 것을 뺏어서 만들어진다는 인식은 쉽게 통용되지만, 그 안전장치가 나와는 그렇게 무관한가. 아픈 몸이 자기관리의 실패와 등치되고 우리는 항상 정신으로 몸을 통제하려 한다. 그래서 몸이 그렇게 정신의 설계대로 움직이던가. 백신 부작용이든 저혈압이든 정형외과적 부상이든 덜컥 아픈 몸이 주어지고 나면 그 미약한 안전장치에나마 기대야만 한다. 비단 엘리베이터와 경사로만의 문제는 아니다. 덜컥 찾아오는 소수자성은 신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안전하게 이동하고 사회활동을 할 수 있을 만한 안전장치가 충분한 사회를 안전한 사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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