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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인 Mar 25. 2022

진짜 페미니스트 정치인을 찾아

대선과 여성의 날에 부쳐 말하려 했으나 지긋지긋하다

사전투표를 했다. 이번 대선만큼 2030 남성 표심을 잡겠다고 헤이트 스피치를 앞세운 경우는 없었다. 동시에 페미니즘이 이렇게 큰 키워드로 정치판에 떠오른 적도 없었다.  청년 남성의 ‘손해’를 내세워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페미니즘을 깎아내리려 드는 지금,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내세우는 여성들에게 더 관대해지기를 바란다. 여자에게 관대해지자는 문장 자체는 여성들 사이에서 반박의 여지가 없다. 모두가 동의하는 말은 반복한다 한들 의미도 없다. 한창 여성학을 공부하고 생각 정리할 때 이후로 더 깊이있게 나아가질 못해서 스스로의 말이 정체된 논리처럼 느껴진다. 워낙 뻔한 레토릭이라 말하지 말까, 하다가 대선과 여성의날이 겹친 시점의 시의성이 있어서, 그리고 ‘여자에게 관대하자’고 말은 하지만 여전히 ‘진짜 페미니스트’에 대한 감별은 유효해서 말해야 할 것 같다.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운 정치인, 유튜버, 연예인, 창작자 등의 유명인사들은 소위 ‘페미코인’으로 쉽게 지지를 얻는 듯 싶지만, 페미니스트인줄 알았는데 OO해서 손절했다며 그만큼 쉽게 도마에 오른다. 이 뻔하고 뻔한 이야기를 지금 해야겠다고 느낀 것은 이재명 후보를 둘러싼 반응 때문이다. 최근 업로드된 이재명 후보의 여성공약 관련 연설은 흠 잡을 곳 없이 훌륭하다. 국민의힘의 지속적 여성혐오정치나 가장 최근 단일화 이슈 등, 선거 막바지에 이재명 후보의 여성정책 홍보가 여성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오는 것은 당연하다. 신기한 점은 이재명 후보의 여성정책이 떠오르며 심상정 후보의 페미니스트 행보에 대한 진정성 검열이 함께 가동되는 점이다. 심상정 후보에게 투표를 하고 안하고야 물론 자유이지만, 왜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여성들이 유독 심상정 후보에게는 ‘여성 인권보다 노동자, 성소수자 인권을 더 챙긴다, 여성들을 끼워판다’는 비난을 가하는지는 들여다볼 만 하다. 여기서 심상정 후보가 진짜로 페미니즘을 끼워팔기 위해 이용하는지 진정성있는 페미니스트인지의 사실관계는 중요치 않다. 페미니즘 리부트 훨씬 이전부터 여성 정책을 내세워온 정치인인데도 ‘다른 소수자를 끼워판다’는 이유로 ‘입페미’ 낙인이 찍힌 점이 중요하다. 애초에 페미니즘을 ‘끼워서’ 팔지 않는 정치인이란 존재 가능한가? 페미니스트라면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긍정적 피드백을 돌줘야 하는데 오히려 누구보다 열심히 분석하고 비난한다. (이재명에게 화답하는 것을 비판할 생각 전혀 없으며-오히려 바람직하며-페미니즘 이름만 걸리면 무조건적 지지를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페미니즘 관련 글/말을 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자동적인 쿠션 깔기 지친다.) 안 하던 사람이 페미니즘 말하면 ‘다른 건 몰라도 페미니즘이 있으니까 지지’가 되는데, 평소에 페미니즘 말하던 사람이 A를 말하면 ‘아무리 페미니즘이 있어도 A 때문에 지지불가’가 되는 모순적 반응을 말하는 것이다.

비판 중요하다. 페미니즘을 깊이있게 알고 주관을 가질수록 페미니즘적 행보에 비판점이 보일 수밖에 없다. 다만 온라인 상에서는 욕설 안하는 악플과 비판을 구분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쓰까’들의 요구기준이 너무 높아서, 래디컬 페미니스트를 악마화해서 페미니즘이 망한다고 한다. 비-래디컬 페미니스트 (혹은 비-페미니스트) 들은 래디컬에서 오만 가지를 여성혐오라고 검열해서 페미니즘이 망한다고 한다. 양 극단은 통한다고, 페미니즘인지 휴머니즘인지 모를 박애주의 및 인격수양 사상의 극단과 ‘여자만 챙긴다’는 래디컬 페미니즘의 극단은 결국 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 엄청난 자격기준을 부여하고 사이버불링에 능하다는 점에서 굉장히 닮아있다.


여성만을 위하지 않아서 안 된다는 말. 여성은 하나의 집단이 아니고, 여성들이 자신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자연히 더 많은 집단의 권리의제까지 관심을 뻗고 연대하게 된다. ‘여성들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 같냐, 여성들이 세상에서 제일 약자다’라는 2003년 버전의 페미니즘 명언을 이제 그만 보고 싶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2003년, 많이 봐줘서 2016~18년의 리부트 초기에는 유의미했다. 페미니즘을 이제 막 접하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말이다만 그 명언을 내세워서 페미니즘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복잡성을 ‘여자가 너무 착해서’로 퉁쳐버리는 공론의 초기화 행위를 질리도록 많이 봤다. (그래서 여성의당이 표방하는 정치 방향을 개인적으로는 별로 안 좋아하지만 여성혐오가 가득한 정치판에서 존재 의의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반대로 불행배틀 가스라이팅의 함정도 있다. 너희 여자들은 시스젠더/헤테로/비장애/정규직 등등등이라서 결국 ‘덜 약자’다, 뭘 모른다, 충분히 pc하지 않으니 발언하지 말라는 식의 입막음이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라는 말과 함께 주로 등장한다. 도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서 말하고자 한 건 이런 게 아니었을 텐데 참 저자가 알면 뒷목잡을 일이다. 모두를 위한 정치는 존재할 수도 없거니와 존재하더라도  무의미하다. 운동 방향성이 사방을 향하면 정지해 있는 것과 같다.


아, 쓰다가 지루해졌다. 눈 감고도 쓸 수 있고 대본 없이도 줄줄 읊을 수 있는 문장이다. 화나고 답답한 온라인 스캔 말고, 여성학적으로 유의미하고 생산적인 영감을 받을 만한 일이 뭐가 이렇게 없나.


이것도 쉐도우복싱인가? 라는 생각도 한다. 비약적이고 비상식적이고 시비걸기 좋아하는 극단적 인간들로 자꾸 기준점을 잡게 되는 것이 아닌가? 페미니즘이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재생산되고 있어서 동태를 안 볼수는 없는데, 커뮤니티에 매몰된 빅마우스 주도의 답정너식 논의(라고 할수도 없는) 과정을 보고 있자면 기가 쭉쭉 빨린다. 결론은 우리에게 온라인보다 건강한 공론장이 필요하다,인데 코로나 시국에서 그런 환경조성이 어렵다는 결론도 이제는 조금 지긋지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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