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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인 Jul 25. 2023

간편하고 비겁한

곪아터진 교권 침해를 다루는 시선에 부쳐

웬만하면 말을 얹지 않으려 했다. 나는 현재 공교육계에 일말의 연이 없으며, 자녀 계획이 없기에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므로. 교사에 대한 사생활 침해와 부당한 요구, 신규 교사에 대한 과중한 업무부담, 이 모든 것을 교사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환경 등이 맞물린 구조는 제3자가 해결책을 논하기에 무거운 과제다.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애도하는 선이 최선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늘 나의 예상을 능가한다. 이럴 때 보면 사람들은 끔찍한 사건을 반기는 것 같다. 이 사건이 얼마나 특별한지를 앞다투어 자극적인 언어로 실어나른다. 같은 사건의 반복을 막기에 하등 도움되지 않는 방식으로.


"학생인권보호 우선하다 교권침해" 여론 힘실려..
"이렇게 교권이 추락하게 된 데는 교권보다 학생의 권리를 우선하는 학생인권조례가 우선이 됐다는 지적이.."
"학생의 인권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교권이 설 자리가 사라졌고 결국 초등교사가 교내에서 극단적 선택을...."
(<서이초 교사 사망에 입지 좁아지는 학생인권조례> 2023.07.21. 연합뉴스)


기사를 읽으며 첫 번째로 눈을 의심하고 다음으로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학생인권조례로 학생 인권이 지나치게 강조되어서 교권침해가 심각해졌다는 비약적 주장이 무려 경기도교육감과 교육부 차관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니. 이 주장의 전제를 뜯어보자.


(1) 학생인권 + 교사인권에 고정적 총합이 있으며

(2) 한 쪽이 올라가면 다른 한쪽이 내려가는 상충 관계이다.


전제가 합당한지 판단하는 과정은 무지막지하게 생략하고, 사회를 x 와  y 변수 수준으로 단순화한 주장을 이토록 주요한 공론장에 올려야 한다니. 무엇 하나 탓할 대상을 찾는 이들의 아주 편리하고, 에너지를 들이지 않는 사고방식이다. 그로써 숨막히도록 복잡하고 답답한 변화의 길에 마치 명료한 해결책이 있는 양 기만한다. 그렇다면 학생인권조례가 이들의 주장대로 '교권을 위협할 만큼' '학생인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 성별, 종교, 가족 형태, 성별 정체성,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

- 학습과 휴식권, 사생활의 비밀을 유지할 자유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으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조례에 올린다는 이유 하나를 내세워, 보수 개신교를 필두로 한 극우 세력에서는 학교가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질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이니 10년이 넘었다. 이번 일은 파급력이 큰 사건을 빌미로 '이때싶' 학생인권조례를 끌어내리려는 전략에 불과하다. 학생인권과 교권에 대한 그들의 주장이 성립하려면 한 가지 중요한 가정의 사실여부가 검토되어야 한다.


학생들이 정체성과 출신 배경 등에 의한 평등을 보장받지 못하고, 학습권과 사생활을 보장받지 못하는 환경에서는 교권이 추락하지 않는가?
교사가 학생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면, 악성 민원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보통 이런 질문에서는 '라떼는 선생 그림자도 못 밟았고...' '말 한마디 잘못하면 뒤지게 맞았고...' 가 나온다. 교권이 막강했을 때 -> 학생인권이 보장받지 못했다. 따라서, 학생인권이 보장받으면 -> 교권이 막강해질 수 없다. 명제의 대우를 따르면 얼핏 타당한 문장같다. 여기에 한 가지 구체성이 필요하다. 학생인권이 보장받으면 -> 교권이 "50년 전만큼" 막강해질 수 없다. '라떼' 시절의 교권이란 권리를 넘어선 권력이자 폭력이었다. 2023년에 1980년대 교내 폭력의 재현이 교권 보장의 방지책인가. 교사가 학생의 가정사와 재산규모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성차별과 촌지가 공공연하던, 그 시절로의 퇴보가 교사들에게 주어진 최선의 미래인가.


'젊은 여성 교사'에 대한 학생, 학부모의 폭력, 저연차 교사에게 과중한 업무를 부담하는 환경, 교사의 사생활에 대한 몰상식. 이 폭력의 원인은 학생인권조례에서 주장하는 기본권 의식의 부재로 수렴한다. 인권은 파이게임이 아니라는 말을 4년쯤 하면 지긋지긋하지만 한번 더 말하련다. 학생의 기본적인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환경에서는 교사-특히 중첩된 폭력에 노출되는 저연차 여성 교사-의 인권도 결코 보장받을 수 없다. 인권이 '너무' 강조되어서 문제라는 말은 100년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마스크 아래 신상 공개의 두려움을 삼키고 거리에 나선 교사들은 'B교사가 내일의 내가 될 수도 있다'고 외쳤다. 이번 사건은 만연했던 폭력이 곪아터진 일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해당 지역구의 전출교사 통계가 시사하는 바가 있듯이, 지역의 특수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B교사에게 폭언을 일삼은 학부모가 국회의원이라는 소문이 번진 뒤로, 상당히 많은 이들은 '그 국회의원이 누구인지'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 같다. '그 학부모가 국회의원이었대' '있는집 애들이 다니는 학교였대' 라며 환경의 특수성을 가십으로 소비할수록, 생존권을 보장하는 교사들의 목소리는 흐려진다. 중요한 점은, 국회의원이니 판검사니 하는 고위직 자녀의 재학여부와 무관하게, 교사에 대한 일부 학부모들의 인권침해는 보편적으로 자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파급력 있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해결 가능한 원인을 찾는 일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원인은 대체로 난해한 교차점에 존재한다. 옆의 작물을 우수수 끌고 나오는 뿌리를 보고 있자면, 잎사귀만을 잘라 전리품으로 바치려는 마음도 이해는 할 수 있다. 모두가 원인을 빠르고 명료하게 찾으라고 아우성이다. 잎사귀를 잘라 내놓으면 환호한다. 얽힌 뿌리를 내놓으면 "그래서 결론이 뭐냐"며  비난받을지도 모른다. 해결하려면 너무 많은 것과 힘겨루기를 하고, 때로는 내가 다친다. 지난하고 답답한 과정. 그러나 의미있는 변화는 늘 그곳에서 시작한다. 그렇기에 단순하게 내놓은 답은 반드시 비겁함을 내포하고, 언젠가 그 비겁함의 대가를 치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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