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진이 범람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디지털카메라에 이어 화질 좋은 핸드폰 카메라를 누구나 소유하고 있고, 그래서 누구나 사진을 간단히 찍고, 보정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쉬운 접근만큼이나 이 모든 것을 또 금방 잃고, 삭제해버리기도 한다. 틈만 나면 사진 정리를 하는 내 핸드폰에도 실시간 19225의 이미지가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 중에서 수많은 이미지를 나는 다시 들여다보지 않을뿐더러 찍혔었는지 조차 모르고 있기도 하다.
이런 뉴미디어 시대의 넘쳐나는 방대한 이미지 아카이브에 질문을 던지는 작가가 있다. 바로 책, 사진, 퍼포먼스 등으로 작업하는 미국 예술가 데이비드 호비츠(David Horvitz)이다. 그가 2018년부터 시작한 프로젝트 제목인 ‘노스탤지어(Nostalgia)’는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나 향수(鄕愁)를 의미한다. 이 제목은 사진작가이자 영화감독인 홀리스 프램프턴이 1971년 선보인 실험적 영화에서 차용했는데, 이는 사진들이 불타는 과정을 촬영한 영상으로 기록한 것이다. 사진에 불이 붙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결국 원본 이미지가 손상되어 재로만 남게 되는 순간, 바로 기억이 지워져 가는 모습은 하나의 영상으로 기록된다. 2019년부터 시작된 호비츠의 노스탤지어 프로젝트도 똑같은 서사를 공유하고 있는데, 그는 자신의 작업을 이렇게 설명한다.
“2018년, 디지털 이미지에 압도된 문화 속에서 집중력이 저하되면서 나는 내 사진 아카이브를 지우기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삭제는 예술 작품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를 ‘노스탤지어’라고 번역했습니다.”
« David Horvitz, The Submersion of Images », Jean-Kenta Gauthier Vaugirard, le 22 Octobre 2022, https://www.cnap.fr/david-horvitz-submersion-images ( 30 Décembre 2023 참조)
데이비드 호비츠는 외장 하드, 노트북, 핸드폰에 보관된 압도적인 양의 아카이브와의 작별을 고하며, 설치 미술을 통해 개념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의 아카이브에 저장되어 있던 사진의 일부는 전시에서 관람객의 눈앞에서 1분씩 슬라이드쇼 화면을 통해 보여진 후, 실시간으로 삭제된다. 2022년 파리에서 열렸던 그의 개인전 '이미지의 침수(The Submersion of Images)'에서는 총 16,580개의 이미지가 16,580분에 걸쳐 공개되고, 소멸되었다. 호비츠의 작품의 구상 형태는 뉴미디어 이론가이자 예술가인 레브 마노비치가 말하는 새로운 미디어 문화를 대표한다. 이는 선택의 조작과, 제어에 의한 것으로, 한 때 가위와 풀이 필요했던 작업을 Ctrl C, Ctrl V와 같은 클릭만으로 간단히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노스탤지어는 동시에 뉴미디어 시대에 대한 역설을 선보이기도 한다. 바로 '삭제' 행위를 통하여 디지털 매체의 무한한 재생산과 영원성과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데이비드 호비츠의 아카이브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일까? 이는 '아카이브의 이동’으로부터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홀리스 프램프턴의 영상 작업이 사진에서 영상으로 기록 매체가 다시 쓴다면, 호비츠의 노스탤지어는 두 가지로 변화를 제시한다.
첫 번째로, 본 프로젝트는 2019년 동일한 제목 '노스탤지어'로 책의 형태로도 출판된다. 왼쪽의 사진과 같이 간략한 텍스트로 이루어진 책은, 각 페이지 당, 하나의 이미지를 산문시의 형태로 간단히 묘사하고 있다. 이는 촬영 날짜, 파일명과 함께 간단히 기록되어 마치 노트북에 저장된 사진을 글로 읽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전시장에서 1분만 존재하고 삭제되어 '일시성'을 띄고 있는 퍼포먼스적 설치작업, 노스탤지어는 책이라는 전통적 아카이브로 다시 남는다. 파일로 존재했던 비물질적 작업이 다시 물질적 매체로 변화하는 점이 흥미롭다.
두 번째로, 그의 전시는 아카이브의 이동성 또한 보여준다. 2022년 전시 인터뷰 영상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전시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됩니다. 하지만 나는 방문객들에게 그런 권한을 행사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권리가 있으며, 나에게는 내가 가지고 다니는 사진을 삭제하는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기꺼이 전시장에서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여 자신의 추억이 다른 누군가의 아카이브에 보존되고 기억될 수 있도록 한다. 즉, 사진은 작가의 아카이브를 떠나지만, 타인의 아카이브의 일부가 된다.
가끔씩 어릴 때의 앨범을 뒤적여 볼 때면, 남아있는 몇 장의 사진들이 한없이 소중하고 특별하게 여겨진다. 분명 현재를 기록하는 사진이 더 많지만, 좀처럼 인화하는 사진은 드물고, 인화를 하더라도 추억을 꼭꼭 눌러 몇 장에 간직하는 고귀한 과거의 사진과 비할 수가 없다.
디지털 사진의 도래와 함께 쇠퇴한 사진의 기록적 가치야 말로, 어쩌면 현대의 노스탤지어가 아닐까?
참고문헌 : Lev Manovich, 뉴미디어 언어, Dijon, Les Presses du Réel,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