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는 소설이 아니다.
제품의 사용성을 개선하다보면 디자이너 본인이 사용자 전체를 대변한다고 착각하기 쉽다.
내가 불편하다면 모두가 똑같이 느낄 것이라 생각하고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기획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학부생 시절부터 비슷한 케이스를 많이 봐왔고 나 역시도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나의 세상은 너무나도 좁고, 내가 했던 경험에만 국한되어 판단하기 쉽다. 이런 오류를 방지하고자 제품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활용하는 장치가 바로 페르소나(Persona)이다.
페르소나는 가상의 사용자이다.
우리 제품의 현재 사용자 또는 타겟으로 하는 사용자를 가상의 특정인물로 만든 것이다. 이 특정 인물이 우리 제품을 접하고 경험하고 이탈하고 재경험하는 일련의 고객경험을 그려보며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하는 데 사용된다. 자칫 행복회로를 돌리거나 개인적인 경험을 대입해 제 입맛대로 제품을 만들 위험이 있는 프로덕트 제작자의 주관을 배제하고, 실제 사용자의 시선을 빌려 잊고있던 맹점을 찾는 것에 도움이 된다. 페르소나가 실제 사용자를 대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만큼, 이는 정량/정성적인 데이터와 현실적인 사용자의 특성을 바탕으로 짜임새있게 설계되어야 한다.
페르소나를 만들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기존 사용자의 데이터를 활용하는 것이다.
운이 좋다면, 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에서 이미 수집하고 있던 회원정보나 GA등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주 사용자의 형태를 그려볼 수 있다. 가령 우리 서비스를 주로 접속하는 지역이 어느 곳인지, 회원의 연령층이나 소비여력은 어떤지, 어느 페이지에 가장 오래 머물고 어떤 상품의 구매율이 가장 높은지 하는 것들 말이다.
예를 들어 세탁서비스의 페르소나를 만든다고 가정했을 때, 세탁 주문이 많이 들어오는 지역과 주로 수거되는 품목 그리고 계절이나 시간 등의 데이터를 참고해서 페르소나를 만들 수 있다. 가령 '최근 1년 내에 주문율이 가장 높았던 지역은 신림/신촌/혜화 인근이었으며 6월,9월에 침구류 세탁 주문이 많았다' 라는 데이터가 나왔고, 최근 급증한 사용자를 장기고객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페르소나를 다음과 같이 설정할 수 있다.
이름: 김우주
(특정 인물이 연상되지 않는 흔한 이름으로 지정합니다. 이름을 지정하는 이유는, 페르소나 설정 후 해당 페르소나를 지칭할 때 구성원들간의 커뮤니케이션 시간을 단축시키고 몰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신림사는 사람...' 이라는 설명없이 '김우주씨'라는 말로 대변할 수 있으니.)
거주: 신림동
서비스 사용빈도: 1년에 2~3회
주로 신청하는 서비스 종류: 침구류, 대형세탁물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페르소나의 디테일이 부족하다.
페르소나를 구체화시킬 수 있는 리서치 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유사서비스, 경쟁서비스의 데이터를 활용한다.
(2) 서비스가 포함된 시장을 리서치한다.
(3) 우리 서비스를 사용할 가능성이 있는 인구층을 대상으로 한 통계자료를 활용한다.
(4) 현장에서 관찰한다.
(1) 유사서비스, 경쟁서비스의 데이터를 활용한다.
쉽게 말해 e-book 구독 서비스의 페르소나를 만들고자 할 때 밀리의 서재, 리디북스, 스토리텔 등 기존 서비스의 자료를 참고하는 방법이다. 우리 서비스와 같은 업종에 종사하거나, 비슷한 분류의 유저를 가지고 있는 다른 서비스의 데이터를 활용하는 이 방법은 (2),(3,)(4)에 비해 가장 신뢰도 높은 페르소나를 만들 수 있다.
단, 타 기업에서 그런 데이터를 공개할 확률이 적고, 공개된 것 중에서도 내가 필요한 데이터를 찾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도 찾아봐야지….
(2) 서비스가 포함된 시장을 리서치한다.
이 방법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거나 기존에 없던 아이템을 기획할 때 활용하면 유용한 방법이다. 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보다 상위 개념에 있는 서비스나 시장을 찾아보거나, 같은 고객층을 지닌 서비스를 찾아서 부족한 데이터를 보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기예보를 분석해 날씨에 맞는 옷을 매칭해주고 구매로 연결해주는 서비스'를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크게 일기예보(주기능)/의상추천(부기능)/커머스(수익창출수단) 으로 나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영역에 해당하는 세 시장을 각각 리서치한다. 리서치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a) 일기예보를 챙겨보면서 패션에도 관심있는 유저, (b) 일기예보를 챙겨보지만 패션에는 관심없는 유저, (c) 일기예보는 잘 안 챙겨보지만 패션에는 관심있는 유저, (d) 일기예보도 잘 보지 않고 패션에도 관심없는 유저 집단의 특징을 나눌 수 있다. (a)는 우리 서비스를 사용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유저이며 페르소나에 반영해야 할 대상, (b),(c),(d)는 조사한 특징을 바탕으로 페인포인트와 니즈를 파악해 (a) 집단에 유입시켜야 하는 대상이다. 이 때 (b~d)에 대한 솔루션은 UX 개선이 될 수도,마케팅이 될 수도 있다. (UX와 디자인 개선만으로 모든 사람을 사용자로 유입시키기는 힘들다.)
(3) 우리 서비스를 이용할 가능성이 있는 인구층을 조사한다.
실제 고객을 대상으로 수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외부 통계자료를 활용해 페르소나를 구체화한다. 예를 들어 앞서 든 예시에서 주문이 많은 지역이 신림/신촌/혜와 등이라고 했으므로 이 지역의 특징과 인구특성을 알아보는 식이다. 이 때 활용할 자료는 KOSIS나 서울열린데이터광장, 한국갤럽, 유료서비스인 statista 등… 많다. 대학생 때 자료조사 좀 해봤다면 알고있는 사이트가 많을 것이다.
(이어지는 데이터는 예시이니 자세히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를 들어, 서울시 인구통계자료를 살펴보니 2022년 기준 신림동, (인접한 지역인) 보라매동, 서원동의 성비는 비슷한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하는 연령대는 20~34세, 중위연령은 32세이다. 해당 지역의 경제활동인구는 전체의 70%이며 야외활동은 오전 8시 ~ 오후8시에 고르게 분포하였다. 가구형태는 1인가구가 14만, 2인가구가 5만, 3인가구가 3만으로 1인가구의 비율이 월등히 높다. 해당지역이 속한 관악구의 주택형태는 방4개가구가 30%, 원룸이 25%, 3개가 22%, 2개가 16%를 차지하였다. 보증부월세가 38%, 자가가 31%, 전세가 25% 등이다.
추가로 트렌드 보고서에서 해당 연령대의 소비트렌드를 살펴보니 '갓생', '자기계발', '양질의 삶을 위한 자기투자' 등이 관찰되었고 최근 가장 큰 고민은 진로와 커리어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자체 수집할 수 없었던 소비자의 특성을 외부 데이터를 통해 보완하면 다음과 같은 페르소나로 구체화된다.
김우주, 여성, 32세
거주: 신림동 원룸 월세
서비스 사용빈도: 1년에 2~3회
주로 신청하는 서비스 종류: 침구류, 대형세탁물
가구형태: 1인가구
경제활동: 4년차 직장인, 연봉 3800.
소비형태, 관심사: 자기계발과 취미생활에 집중하기 위해 그 외의 집안일이나 잡무들은 서비스나 기기의 편의를 이용한다. 욜로족은 아님.
생활루틴: 8시 출근, 9-6 근무, 7시 이후 귀가, 귀가 후 1시간 저녁식사, 이후 12시까지 3~4시간 가량 휴식과 자기계발. 12시~1시 취침.
사용기기: 아이폰12
정보를 얻는 매체: 인스타그램, 유튜브, 카카오광고배너, 지인추천
이렇게 기존 사용자에 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만든 페르소나로는 현재 서비스의 페인포인트를 파악하고 사용성을 개선하기에 유용하다.
(UX를 디자인하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데이터 기반 디자인이 척척 가능하다면 밥 안 먹어도 배부른 상황이다.)
(1),(2),(3) 은 앞서 예시를 든 것 처럼 공신력있는 통계나 트렌드 보고서만 제대로 찾으면 사무실에 앉아서 편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나같은 경우에는 이런 정적인 자료만으로는 아쉬워 (4) 현장관찰을 추가로 수행했다.
(4)현장에서 관찰한다.
미술전시 관련 서비스의 유저 페르소나를 기획해야 하는 과업을 담당한 적이 있었다. 데이터 기반으로 페르소나를 만들었지만 나이,지역 처럼 수치화되는 자료가 아닌 사용자의 행동이나 니즈를 파악하기엔 부족했다. 바로 다음 주말부터 2~3주 동안 주말과 퇴근 후에 시간을 내 전시를 다녔다. 피크닉, 리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코엑스, 팝업스토어 등 유동인구가 많고 활성화 되어있는 전시장 위주로 방문해 오랜 시간 머물며 작품 대신 관람객을 관찰했다.
관찰 결과, 전시장 근처에 머무르는 관람객들의 대화에서 전시를 방문하게 된 경로, 굿즈 구매계획, 웨이팅 시스템 또는 전시 구성에 대한 불만 등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전시장 내에서는 전시 초반에 비해 후반 집중도가 확연히 떨어지며 체력적 한계로 후반 작품 감상을 포기하고 전시장을 이탈하는 관람객들이 더러 관찰되었다. 따라서 전시의 중후반부를 차지하는 작품들은 음성 도슨트가 제공되는 작품, 포토존으로 입소문난 작품 위주로 관람객이 모여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효율성 있게 관람하고자 하는 관람객의 특성과 니즈를, 데이터에서는 볼 수 없었으나 현장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덧붙이자면 이전에 pxd의 유저 리서치 과정을 상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현장에서 사람들을 직접 관찰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의 UXUI를 디자인하기 위해 pxd의 직원이 직접 해당 병원에 입원해 환자를 체험하고, 간호사와 환자를 관찰하고 인터뷰하는 과정을 통해 문제점과 솔루션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UX를 하고자 한다면 사용자를 직접 만나고 현장에 뛰어드는 일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페르소나를 만드는 작업이 캐릭터를 만드는 것 같아 재밌을 때도 있지만, 자칫 혼자만의 창작세계에 몰입해 허구의 인물을 뇌피셜로 창작하게 될 수도 있으니 지속적인 주의가 필요하다. 나도 페르소나를 설정할 때 마다 주관적 판단을 넣지 않도록 날을 세우는 일이 가장 어렵다.
3~4개의 페르소나를 지정하는 것이 적당하다. 너무 적으면 시선이 좁아지고, 너무 많으면 기획이 산으로 간다. 만들어진 페르소나는 일회성으로 사용하고 버려지는 게 아니라 서비스와 함께 계속 동행한다. UX 개선이나 디자인 리뉴얼, 프로모션 기획 등에 수시로 호출되며 서비스의 방향을 다잡아주는 소울메이트같은 존재이다. 나중에 보면 실제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내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