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스톡홀름 | Stockholm, Sweden
스톡홀름 Stockholm의 공기는 상쾌했다. 공기만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서 스피아민트 향이 나는 것 같았다. 시차를 떨쳐내고자 진한 커피를 한 잔 시켜 밖이 보이는 창가석에 앉았다. 순식간에 나를 난쟁이 오징어로 만들어버릴 훤칠하고 늘씬한 북유럽 남녀들이 하나 둘 지나간다.
‘여긴 무슨 전 국민이 모델이야?’
살짝 위축감도 느끼지만 이내 그들의 세련된 패션에 감탄을 한다. 패션은 이태리, 프랑스라고 하지만 난 시크하고 도시적인 북유럽 패션이 그렇게 멋져 보였다. 하긴, 저러한 길이에 무엇을 입은 들 멋지지 않으랴. 역시 패션의 완성은 외모지 생각하던 그때, 하늘색 유모차가 눈에 들어왔다. 돌이 채 안 된 듯 보이는 여자아기와 젊은 아빠가 같이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예뻐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잠깐, 오늘은 평일이잖아?’
직업이 없는 건지, 일하는 중에 잠시 휴식시간인지, 아니면 육아휴직 중인지 구체적인 건 모른다. 하지만 굳이 묻지 않아도 되었다. 평일 낮, 아빠와 아이가 함께 있는 것이 이 가족만의 풍경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 스웨덴 남자들은 평일 대낮에 유모차를 끈다.
여행 내내 스톡홀름 시내 곳곳에서 아기를 안고 장을 보거나, 유모차를 밀며 조깅을 하거나, 아이와 자전거를 타는 아빠들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육아천국, 양성평등의 나라라더니, 진심이다 이 나라.
이처럼 스웨덴 아빠들이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던 배경에는 탄력적인 육아휴직제도와 각종 지원금이 있다고 한다. 스웨덴 정부가 지급하는 유급 육아휴직일 수는 총 480일이다. 출산 후 첫 2주간은 엄마와 아빠가 반드시 같이 사용해야 하고, 이후에는 편의에 따라 어떤 비율로 나눠도 상관없다. 단 양성평등을 위해 부모 중 한 사람이 390일 이상을 쓸 수 없도록 막아뒀다고 한다.
미국에도 한국에도 평일에 유모차 끄는 라테파파들이 더 많이 보이면 좋겠어, 이야기하며 옛 도시 감라스탄으로 향했다.
감라스탄 Gamla Stan에는 연어 낚시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물이 흐르는 호수가 있다. 구불구불한 골목들은 옛 건물을 개조한 레스토랑과 카페들로 오밀조밀 채워져 있다.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골목 이곳저곳에 들러붙은 이야기의 조각들이 다시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종알종알 말을 거는 듯하다. 중세 사람들의 체취가 느껴지는 닳고 닳은 바닥 돌은 거칠지만 정겹다. 두 사람이 동시에 지나가기도 어려운 비좁은 모르텐 트로치그 그렌 Mrten Trotzigs Grnd 골목을 걷다 보면 어린 시절 동네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며 숨바꼭질하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쾨프만가탄 Kpmangatan길의 골동품점들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녹슨 청동판을 간판으로 디자인해 고풍스러움이 느껴졌다. 항상 생각하지만 골동품점이야말로 살아있는 근대사 박물관이다. 가게에 들어서니 옛 물건들에서 나는 특유의 쾌쾌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오래된 듯한 목각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꼬리가 없는 말 모양이다. 주인분께 여쭤보니 스웨덴을 대표하는 민속 공예품 '달라호스 Dalahorse' 라 한다. 스웨덴어로는 달라허스트 Dalahäst라고 현지 발음도 알려주셨다. 이 전통 목각 말은 스웨덴 중부에 있는 달라르나 Dalarna지방의 나무꾼들이 일을 마치고 자녀들을 위해 만든 목각 말에서 시작되었다 한다. 길고 긴 북유럽의 겨울밤, 마땅한 장난감이 없던 아이들에게 손수 깎아 만든 나무말을 선물한 아버지의 사랑이 전해져 내려와 '행복을 나르는 말'로 알려졌다. 여전히 스웨덴 몇 개의 마을에서 전통적인 수공업 방식으로 만들어지는데, 그래서 세상에 똑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단다. 조각에 적합한 최상급 소나무를 골라 깎고, 다듬고, 색을 칠하는 여러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기에 귀한 공예품이라 한다. 내가 본 달라호스는 대량 생산되기 훨씬 전 만들어진 진귀한 목각인형이라 한다.
배낭여행객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운 가격이었기에, 친절한 설명에 감사인사를 건네고 골동품점을 나와 길 건너 기념품샵에 들렀다.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부터 엄청나게 큰 크기까지, 다양한 색상에 특유의 무늬가 입혀진 달라호스 기념품이 여기저기 보인다. 유럽 여행의 시작이라 가방의 부피를 생각해 큰 기념품을 살 수 없어 작은 달라호스 모양의 열쇠고리 하나를 구입했다. 나중에 이케아 Ikea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을 위로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골목을 지나 대광장 Stortorget에 다다랐다. 노벨 박물관과 매년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는 스웨덴 아카데미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궁전으로 보이는 크림색 건물 앞에 남색 제복과 모자를 쓴 근위병 몇 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그중 몇 명은 여성이다. 여자 근위병이 있다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도 남성 근위병에만 익숙해서인지 이색적으로 느껴졌다. 역시 남녀평등의 나라답네, 생각하며 벤치에 잠시 걸터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대광장에서 바라보는 스톡홀름은 또 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화려하지 않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품격이 스며있는 도시랄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을 그대로 보존할 만큼 옛 것을 소중히 여기지만, 동시에 독립과 평등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중요시하는 혁신적이고 포용적인 나라, 스웨덴. 품격은 이런 데서 오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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