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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Sep 11. 2024

자기 속임

세상몰라도 본인은 아는

  어려서 놀러 간 친구집에서 친구 엄마가 내 주신 과자. 모양도 생소했지만 맛이 놀라웠다. 입에 넣고 씹을 것도 없이 사르르 녹는 것, 얇은 종이처럼 생겼는데 손에 잡기는 잡았지만 먹으면 빠싹 부서지는 것, 종이 씹을 때처럼 알갱이가 씹히는 것 등등. 자야, 뽀빠이, 라면땅 밖에 몰랐고, 그마저도 한 봉지 얻으면 충분했던 시기에 바다 건너 해외에서 왔다는 과자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신세계. 과자가 이럴 수 있다니.


친구 엄마는 사투리도 쓰지 않았다. 흔히 경기도 사투리를 경사 쓰는 사람이네라며 상대방을 깎아 거리감을 둔 표현을 했지만, 약간의 부러움과 시기심을 내포한 단어였다. 친구 엄마의 서울 쪽 억양은 당시 경상도 사투리가 심한 내겐 생소한 말투였다. 받아쓰기 시험을 치면 선생님이 불러준 단어를 사투리로 옮겨 받아 소리 나는 그대로 쓴 탓에 빵점을 달고 살았을 만큼 내 사투리는 심했다.


그런 친구 엄마가 갑자기 친구에게 뭘 물었는데 머뭇거리며 답변을 못하는 친구를 두고, 친구 엄마는 내게도 같을 질문을 했었다. 나 역시 무슨 말인지 몰라 다시 묻기도  뭣해서 그냥 실실 웃었더니, 친구 엄마는 '봐, 네 친구는 알잖아. 넌 그것도 모르냐.'라고 친구를 몰아붙인다.


순간 나도 모르게 이렇게 웃는 모양만으로 잘못에 대한 모면의 방편이 될 수 있음에 놀랐다. 씩 웃는 표정이 상대로 하여금 그것도 교양 있어 보이고 경사를 쓰며 외국 과자를 먹는 친구 엄마에게 통한다는 사실에 뭔가 띵하게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웃는 표정으로 위기를 덮을 수도 있구나. 그러나 모르면 모르는 지 모르는 걸 가려봤자 여전히 본인 모르고 있음을 스스로는 알고 있으니. 몇 번을 비슷한 방식으로 위기를 넘길 순 있어도 반복될수록 오히려 나 스스로 더 불안해지고 만다.




어느 노승이 있었다. 평소 근엄하며 말씀이 적고 편안한 표정으로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가끔 노승과 차담을 나누던 지인들도 노승을 대단한 도력을 지닌 분으로 떠받들었다. 역시 깨치신 분이라 다르다며.


노승은 늙어가고  열반에 들 시간이 가까워짐을 느끼던 어느 날. 노승은 늦은 밤 시봉하던 제자를 앉혀놓고 눈시울을 적신다.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는데 두렵다. 죽기 싫은데 어찌하나.


제자가 처음 이 말을 듣고 순간 귀를 의심했다.  생사를 초월한 줄 알았던 스승의 말이 아니다. 일념으로 노력해서 득도를 한 일반인도 있는데, 시주밥 먹어가며 몇 십 년을  공부한 이가 마지막 죽음을 앞에 두고 두려워하다니. 노승은 처음 꺼내기 저어하던 때와 달리 점점 강도가 심해지면서 노골적이다. 나 좀 살려주라. 나 좀 살려줘. 잡는다.


실망한 제자는 차마 아무에게도 이 일을 이르지 못한다. 아, 그리 오래 공부하신 분도 이럴 수 있다니. 며칠을 고민하던 제자는 노승의 말씀에 가슴을 친다. 그 인간적인 면에 결코 본인 자신은 속일 수 없는 그 솔직함. 또 며칠 지나 제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말이 나를 위한 마지막 가르침임을. 이 길은 자신에게 바닥까지 가장 솔직해야 함을. 걷는 걸음에 누구도 무엇도 대신할 수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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