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ADHD의 슬픔 (정지음)
◆ 작가의 글
작가의 문체는 작가가 좋아한다는 화려한 문장들의 나열이었다. 나는 사실 정반대의 취향을 가지고 있어 수사가 가득한 문장을 보면 피로감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정지음 작가의 글은 그 수많은 수사와 비유와 묘사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끄는 데가 있었다. 모든 비유들이 마치 찰떡같아서 지금 작가가 어떤 기분을 느낀 건지 단번에 이해되기도 하고, 많은 묘사들이 (추상적인 개념일지라도)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나는 어렸을 때, 화가 많이 나거나 흥분하여 마음을 가라앉혀야겠다고 생각할 때면, 내 명치쯤에 심장 비슷한 빨간 덩어리가 있고, 이걸 얇게 편썰어 한 장씩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상상을 하곤 했다. 내가 이런 상상을 더 구체적인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작가와 같이 웃음짓게 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을 던진다면 자신이 없다. 진지하고 어두운 주제조차 위트와 유머를 섞은 글로 풀어내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했다.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형광펜으로 칠하고 싶은 문장이 너무 많아 가방에서 펜을 넣었다 뺐다 하는 나를 옆자리 아저씨가 너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정말 꼭 기억하고 싶은 문장만 골라내느라 진땀을 뺐다.
◆ 성인 ADHD에 대하여
석사 과정 중, 랩미팅에서 졸업논문 주제를 정하기 위해 각자의 관심사를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동기 중 한 명이 ‘성인 ADHD’를 중심으로 발제를 준비해왔는데, 발제가 끝난 뒤 교수님이 처음 한 말은 “근데... 왜 성인 ADHD야..? 00이가 너무 힘들 것 같은데...” 였다. 제자가 오랜 시간 고민해서 본인이 진정 하고 싶은 연구주제를 가져왔으리란 것을 알면서도 교수님이 희망차지 않은 피드백을 준 건 그만큼 성인 ADHD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아동기 ADHD에 대해서는 수많은 연구가 오랫동안 이어져 왔고, 따라서 그 징후라든가, 원인이라든가, 치료방법이라든가, 많은 부분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다. (물론 아동기 ADHD도 꾸준히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다.) 하지만 성인기에 나타나는 ADHD에 대해서는 학계의 주목을 받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래서 어느 정도 수준 이상으로 확언할 수 있는 부분이 여실히 부족했다. 이 친구는 결국 다른 수업 시간에 성인 ADHD를 주제로 리포트를 쓰고, “자료가 너무 없어서 안 되겠어.” 라며 다른 병리로 졸업연구를 진행했다.
그만큼 성인 ADHD는 학계에서도, 사회에서도 낯선 개념이다. 여전히 변화해야 할 부분이 많지만, 정신병리 자체에 대한 사회의 인지가 발달하였고, 유병률이 높은 정신병리(아동기 외현화 장애, 성인 정서장애 등)에 대해서는 “정신과에서 진료를 받고 처방을 받는 것이 확실히 도움이 된다.”라는 방향으로 사회의 인식이 개선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유병률이 낮은 정신병리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적절한 인식이 주를 이룬다. “무슨 애가 우울해. 그냥 얌전한 거지.”, “야, 다 커서 무슨 ADHD야, 그냥 절제력이 부족한 거 아니야?” 심지어 사이코패스 성격 특성을 중심으로 아동기부터 성인기까지의 외현화 문제를 다루었던 나 역시 동기가 발제하기 전까지 성인기 ADHD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작가가 더욱 외롭고 무섭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찌 보면 유쾌하고, 또 어찌 보면 담담하게 써내려갔지만, 직접적으로 표현한 답답함과 우울감 이면에, 우리에게 차마 보여줄 수 없는 수많은 공부와 좌절과 슬픔이 보이는 것 같아, 감히 작가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은 편이어서, 내 주변에는 정신병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았고, 그에 대해 함께 공부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래서 나와 상대방의 문제에 대해서 더 자유롭고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결국 저들도 나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잖아.’라는 외로움과 불안이 나를 사로잡을 때가 많다. 하물며 자신의 병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더 많은 환경에서 작가가 겪었을 그 모든 부적 감정들은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그 경험을 재치 있게 써내려갔다. 결국 자신의 병을 받아들였고, 이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고 있고, 자신을 더욱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고자 끝없이 노력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나 역시 외현화 문제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작가에게 공감하는 상황이 정말 많았는데, 병리적 수준이 아닌 나도 생각하고 시도하지 못 하는 방법들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도전하는 작가에게 요즘 래퍼들이 하는 것처럼 ‘shout out’을 보내고 싶었다. 작가가 거듭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작가의 응원이자, 그 지난하고 좌절스러운 싸움을 해온 자신에 대한 인정이자, 또 앞으로도 평생 그 전쟁을 치러낼 자신에 대한 다짐일 것이다. 작가가 더 크고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 본다.
▷ 오랫동안 혼자 울던 사람은 쉽게 웃는 방법을 경계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p.10)
▷ ‘든 것 없이 가벼운 인생’은 관점을 바꾸자 ‘잊음으로써 가뿐해지는 인생’이 되었다. (p.19)
▷ 나는 합법적으로 즐길 수 있는 모든 쾌락에 몰두한다. 누군가 눈살을 찌푸릴 때까지 하고 또 한다. 하지만 일에 빠진 적은 없다. 일에 대해서는, 일하기 싫다는 생각에 중독되어 있다. 이것도 일중독 중 하나라면 모든 항목에 동의한다. (p.25~26)
▷ 나를 구성하는 지독한 양극단의 요소들이 가끔씩은 찬란하게 빛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약간의 영광으로 큰 하자들을 독려하며 인생의 기울기를 견뎌 내고 있었다. (p.36)
▷ 타성에 젖기만 하고 이겨 본 적은 없는 내가 너무 큰 싸움을 시작한 건 아닌가 두려워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나와 싸우지 않으면 온갖 종류의 채권추심과 싸우게 될 테니 더욱 두려운 것을 맞닥뜨리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억제에 대한 타성보다 무서운 분출이 세상에 너무 많다. (p.83)
▷ 하지만 원망이란 내게 있는 보잘것없는 재주들까지 깡그리 소멸시키겠단 다짐이어서, 원망만 하다 정말 가난한 인간이 될까 봐 그만 두었다. (p.136)
▷10여 년이 지나도록 부모의 세계를 자꾸 떠나려던 나는 고무줄의 관성처럼 여기로만 돌아오게 되었다. 그들이 나의 세계가 되어 주어서, 탕아 취급을 받는 순간에도 귀할 수 있었다. 나는 긴 시간 슬퍼했으나, 긴 시간 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천해져도 부모 안에서만큼은 영원한 특권층이자 일등 시민이었다. (p.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