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심리학자(혹은 철학자)로서의 일생 중 대부분을 성적 욕구인 리비도 이론에 바쳤던 프로이트는 말년에 인간의 또 다른 원초적 본능으로 타나토스, 즉 죽음에 대한 욕망을 제안했다. 암으로 인해 건강이 많이 상했을 때이고 그 이론을 더 면밀히 펼치기에는 물리적 시간이 부족했기에 리비도만큼 체계적이지는 않으나 (과학적 증명 여부는 차치한다), 타나토스 역시 많은 예술 작품과 사상에 영향을 미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과 맞닿은 것처럼 보이는 리비도와 달리, 타나토스는 생존 혹은 자손번식이라는 본능과 대치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를 떠올린다면, 누구든 공격과 죽음에 대한 욕망을 상기하며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을 것이다. 김영하 작가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는 소설 전체에 타나토스의 그 검붉은 공기가 흩뿌려져 있다.
한때 자기파괴라는 측면에서 극단적이지 않다면 뭐든 해보려고 했던 나를 되돌아보며 느낀 것은, 그 파괴, 특히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에는 굉장한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는 그 용기와 의지를 부여하는 “나”와, 이를 부여받아 자신을 파괴하는 “고객들”, 그리고 용기와 의지가 없이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C”, 그리고 그런 용기와 의지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K”가 등장한다. “나”는 “고객들”에게 자기 파괴를 종용하고 그 준비를 함께 하며 자신을 ‘신’과 같다고 여긴다. 이후를 알 수 없는 불안하지만 어느 순간 매혹적인 죽음이라는 미래, 적어도 지금 느끼는 지루함이나 공포감에서 벗어나 평안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그 누구도 나를 파괴할 권리가 없지만 나만은 그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알 수 없는 우월감. 그래서 고객들은 결국 자신이 원하던 신세계를 맞이하고, “나”를 신이라고 생각했을까.
길지 않은 소설을 읽으며 내 마음 한 켠이 계속 불편하고 불안했던 것은 작가가 죽음, 특히 자살이라는 주제를 어쩌면 최선의 선택인 듯 그려서만은 아니다. 나는 이 삶에서 도망가고 싶을 만큼 커다란 공포를 경험해 보지도 않았고, 텅 빈 허무 외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 허망함과 지루함을 느껴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어느 순간에는 떠올렸던 그 선택지를, 용기와 의지가 없어 차마 고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고, 그 생각이 무서워 혼자 치를 떨었다는 것이 불편했다. 지금의 나는 절대로 그럴 마음이 없지만, 남은 나의 삶에서 다시 한 번 나의 ‘권리’를 상기하지 않으리라는 자신을 가질 수 있을까. 김영하 작가의 글에 빨려들어간 나의 자신 없는 대답을 알기에, 프로이트는 타나토스라는 개념을 주창했나 보다.
아무도 무료한 겨울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불을 질러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사람들은 스스로를 태워버릴 수밖에 없다. (p.55)
그를 나락으로 밀어넣은 것들은 언제나 그를 매혹시켰던 존재들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 할당된 매혹이라는 이름의 채권. 그 첫 전주(錢主)는 박제된 나비들이었다. 몸통에 핀을 꽂은 나비들이 다시 태어나서도 핀을 꽂은 채로 날아다니는 환상에서 아직까지도 그는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데 왜 그는 가장 사랑하던 것에 핀을 꽂았을까. 지금이라면 하지 못했을 일을 그 시절의 그는 어떻게 해치웠을까. 그는 어쩌면 나비보다 포획, 그것에 매혹되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어느 봄날 그 나비들은 모두 재가 되어버렸다. 부엌에서 치솟은 불은 삽시간에 집 전체를 삼켜버렸고 학교에서 돌아오던 그는 나비를 생각하며 울었다. 너무 서글피 우는 그를 어머니는 달래려 애썼다. 얘야, 집은 다시 지으면 그만이란다. 그 말을 듣고 그는 더 서럽게 울었다. (p.102)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K는 스스로에게 물었으나 해답을 얻지 못했다. 그렇게 한동안 갓길에 서서 그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했지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는 한 번도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나 운전대에 앉아서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후에야 어디로 가야 할까를 생각했다. (p.114)
“아무도 다른 누구에게 구원일 수는 없어요.” (p.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