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독립 Jan 23. 2024

운명에의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수용

독립의 독서 - 해변의 카프카 (무라카미 하루키)


얼마 전 머리를 잠깐 식히고자 사무실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로 눈앞에 내려다보이는 마을에서 까마귀인지 까치인지 알 수 없는 커다란 검은 새 한 마리가 밭 위를 맴돌고 있었다. 작물을 쪼아먹을 듯 낮게 맴도는 그 새를 왜인지 모르게 바보 같다고 생각하며 홀린 듯이 지켜보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새는 점차 고도를 높이며 맴을 그렸다. 더 높이 올라갈수록 새가 그리는 원의 반경도 넓어졌다. 그 전의 원에서 벗어난 듯이 멀리까지 날아갔다가 더 넓은 하늘을 돌아와 원을 완성시켰다. 그러다가 사무실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리 떨어진 산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5분 남짓의 시간 동안 새가 밭에서부터 너른 항공을 맴돈 거리, 그리고 그 밭에서부터 산속으로 날아간 거리를 생각해보자면 내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걸어도 도달할 수 없는 숫자일 것이다. 농작물 도둑일까 걱정했던 바보 같은 새는 그렇게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어쩌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던 본능 혹은 성질에 따라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날아갔다.


몇 년만에 <해변의 카프카>를 다시 읽고 나서 문득 그 새가 떠올랐던 것은 그 때의 그 새가 까마귀로 짐작되었기 때문일까,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어 보이는 시간 뒤에 깨닫게 되는 내 목적지를 찾고 싶기 때문일까. 




나에게 하루키의 소설이 언제나 그랬듯 <해변의 카프카> 역시 재미있게 읽고, 여기저기 맘에 드는 문장에 밑줄을 치고, 책장을 덮은 후에는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지?’ 라는 생각으로 마무리되었다. 우선 밑줄쳐 두었던 문장의 필사는 마쳤는데, 내가 무엇을 느꼈고, 다무라 카프카는 무엇을 위해 그 여행길에 올랐던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여전히 알 수 없는 기분으로 노트와 패드를 덮어버렸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쉽게 잠들지 못한 잠자리에서 예의 그 정처없는 까마귀가 떠올랐다.


조슈아와 함께 일을 시작할 때쯤까지도 우리의 목표는 “돈을 많이 벌자.”였다. 하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들에 한숨만 늘어가던 중, 돈을 번 이후에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차를 바꾸고,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고 좋은 가구를 들이자. 예전에 백화점에서 우리가 자라처럼 목을 빼 매장 안을 들여다보자 고급 소파 브랜드에서 구매 계약을 하던 한 아주머니가 점원에게 ”저기 신혼부부 안내해줘요. 우리 애들도 결혼할 때 이런 거 해주면 되겠네. 가격도 적당하고.“ 라며 친절히 말한 적이 있는데,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가격의 브랜드였던 기억이 났다. 우스갯소리로 ”우리도 돈 많이 벌어서 백화점에서 가구 쇼핑하고 엄청 여유롭게 젊은 커플들한테 그런 말 하자.“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조슈아의 드림카, 내가 살고 싶은 동네와 아파트 등을 열성적으로 논의하다가 이걸로 충분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차를 바꾸고, 이사를 한 후에는?


그리고 놀랍게도 조슈아와 나는 비슷한 목표를 이야기했다. 어쩌면 이전에 각자가 꿈꾸던 어떤 이상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좀더 구체적이고 스케일이 큰, 우리가 만약 FIRE하게 되더라도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어떤 일들. 그 순간 누군가는 갸우뚱할 수 있는 만남을 지나 평생을 약속하고 몇 년째 매일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과 이렇게 커다란 그림까지 함께 그리는 것, 이런 것이 운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이란 그 방향성과 마무리가 정해져 있다는 느낌을 주어서인지 나에게는 언제나 깨부수어야 하는, 일종의 타파 대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최근 한 친구에게 ”나는 평생 이렇게 매일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는 게 운명인 게 아닐까?“라고 이야기하자 친구는 ”야, 그런 게 어딨어. 그런 소리 하지마. 너도 쉬면서 놀면서 살아야지.“라고 답했다. 하지만 <평생 정신없이 일하는 삶>이 나의 운명이라 할지라도, 그 정신없이 해야 하는 일이 나에게 기쁨과 보람을 주는 일이라면? 지금의 나는 정말이지 활짝 열린 마음으로 나의 운명을 받아들일 것 같다. 결국 나의 운명이 무엇인지 정하는 것도, 그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나의 결정일지 모른다.


다무라 카프카가 떠난 여행도 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고,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가출이라는 목적만 가지고 떠난 여행에서 아버지의 저주와도 같던 예언, 혹은 운명을 경험한 카프카는 그 끝에서 자신의 선택을 바탕으로 다시 돌아온다. 과연 여행 후의 그를 여행 전의 그보다 성장하고 발전한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짧은 여행 사이에 성장하고 발전하지 못한들 그 여행이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있어야 할 곳, 내가 나아가야 할 곳을 인식하고, 누군가에 의해 결정되었던 운명을 넘어서 그 뒤의 운명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 그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여행의 과정 속에 있었던 것이니까. 


카프카의 여행처럼 나의 운명을 위한 여정이 이미 끝난 것인지, 아직 그 과정 속에 있는지,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나에게 또다른 예측불허의 경험이 찾아와도 이전처럼 ‘난 왜 이렇게 명확하지 못하지?’라는 불안과 물음을 던지지는 않을 것 같다. 또 다시 정처없는 여정이 시작되어도 어느 한 구석에 굳게 뿌리내린 무언가가 나에게 작은 이정표가 되어줄 것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한다. 




� 어떤 경우에는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진로를 바꿔가는 국지적인 모래 폭풍과 비슷하지. 너는 그 폭풍을 피하려고 도망치는 방향을 바꾼다. 그러면 폭풍도 네 도주로에 맞추듯 방향을 바꾸지. 너는 다시 또 모래 폭풍을 피하려고 네 도주로의 방향을 바꾸어버린다. 그러면 폭풍도 다시 네가 도망치는 방향으로 또 방향을 바꾸어버리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치ㅣ 날이 새기 전에 죽음의 신과 얼싸안고 불길한 춤을 추듯 그런 일이 되풀이되는 거야. 왜냐하면 그 폭풍은 어딘가 먼 곳에서 찾아온, 너와 아무 관계가 없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 폭풍은 그러니까 너 자신인 거야. 네 안에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든 걸 체념하고 그 폭풍 속으로 곧장 걸어 들어가서 모래가 들어가지 않게 눈과 귀를 꽉 틀어막고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나가는 일뿐이야. 그곳에는 어쩌면 태양도 없고 달도 없고 방향도 없고 어떤 경우에는 제대로 된 시간조차 없어. 거기에는 백골을 분쇄해 놓은 것 같은 하얗고 고운 모래가 하늘 높이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지. 그런 모래 폭풍을 상상하란 말야. … 그리고 물론 너는 실제로 그놈으로부터 빠져나가게 될 거야. 그 맹렬한 모래 폭풍으로부터. 형이상학적이고 상징적인 모래 폭풍을 뚫고 나가야 하는 거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놈은 천 개의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네 생살을 찢게 될 거야. 몇몇 사람들이 그래서 피를 흘리고, 너 자신도 별수 없이 피를 흘리게 될 거야. 뜨겁고 새빨간 피를 너는 두 손으로 받게 될 거야. 그것은 네 피이고 다른 사람들의 피이기도 하지.

그리고 그 모래 폭풍이 그쳤을 때, 어떻게 자기가 무사히 빠져나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너는잘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아니, 정말로 모래 폭풍이 사라져버렸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게 되어 있어.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해. 그 폭풍을 빠져나온 너는 폭풍 속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네가 아니라는 사실이야. 그래, 그것이 바로 모래 폭풍의 의미인 거야. (상편 / p.17-19)


� 장소의 이름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화장시로가 식사. 형광등과 플라스틱 의자. 맛없는 커피. 딸기잼 샌드위치. 그런 것에 의미는 없다구. 중요한 건,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아닐까? 안 그래? (상편 / p.50)


� 그에게는 스스로 판단했다든가, 선택했다든가, 그런 건 거의 아무것도 없습니다. 뭐라고 할까, 무척 수동적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인간이라는 건 실제로는 그렇게 쉽게 자기 힘으로 사물을 선택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상편 / p.206)


� “얼마나 멉니까?”

“글쎄, 목적지까지 아마 두 시간 반 정도 걸릴걸. 산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

“그렇게 멀리 가도 괜찮으시겠어요?”

“상관없어. 도로는 곧장 뚫려 있고, 해는 아직 저물지 않았고, 탱크에는 기름이 가득 차 있어.” (상편 / p.211)


� 질이 높은 치밀한 불완전함은 인간의 의식을 자극하고 주의력을 일깨워주거든. 이것 이상은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완벽한 음악과 완벽한 연주를 들으면서 운전을 하다간, 눈을 감고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어질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D     장조 소나타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서 인간이 영위하는 한계를 듣게 되지. 어떤 종류의 완전함이란 불완전함의 한없는 축적이 아니고서는 실현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는 거야. 그것이 나를 격려해 주거든. (상편 / p.216-217)


� “모든 일에는 말이야, 나카타 상, 순서라는 것이 필요하네“ 하고 조니 워커는 말했다. “앞만 보고 가도 안 되지. 너무 앞만 보고 가다가는 발밑에 주의를 안 하게 돼 넘어지기 쉬운 걸세. 그렇다고 발치의 자질구레한 것만 보고 있어도 안 되지. 앞을 잘 보지 않으며, 무언가에 부딪히게 되니까. 그러니까 조금은 앞을 보면서 순서를 좇아 정확히 일을 처리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 말일세. 무슨 일이건 그렇지 않은가.” (상편 / p.280)


� 눈을 감아서는 안 되네. 눈을 감아도 사태는 조금도 좋아지지 않으니까. 눈을 감았다고 해서 무엇인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아니, 오히려 다음에 눈을 떴을 때, 사태는 더 악화되어 있을 거라네. 우리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는 걸세, 나카타 상. 눈을 똑바로 떠야 하네. 눈을 감는 것은 약자가 하는 짓이야.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것은 비겁한 자가 하는 짓이란 말일세. 자네가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가고 있단 말이야, 똑딱똑딱하고.“ (상편 / p.285)


� 자연 속에서 혼자 지내는 것은 분명히 멋진 일이지만, 거기서 계속 생활해 나가는 것은 쉽지 않지. … 이론적으로는 못할 일도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지. 하지만 자연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부자연스러운 것이고 평온함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위협적인 거야. 그 같은 배반성을 잘 받아들이려면, 그 나름의 준비와 경험이 필요해. 그러니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리로 돌아가는 거야. 사회와 사람들이 삶이 영위하는 도시로 돌아가는 거야. (상편 / p.298)


� 다무라 군, 우리 인생에는 되돌아갈 수 없는 한계점이 있어. 그리고 훨씬 적기는 하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점도 있지. 그런 한계점에 이르면 좋든 나쁘든 간에 우리들은 그저 잠자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거야. (상편 / p.315)


� ”그러나 당신은 장어를 좋아하잖아, 안 그래?“

“네, 나카타는 장어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관계성이라는 거야.“

“네?“

“나카타 상은 덮밥은 좋아하나?“

“네, 덮밥도 나카타가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그것도 또한 관계성이라고 하는 거야“ 하고 운전사는 말했다.

“그런 식으로 관계성이 하나하나 모이면, 거기에서 자연히 의미라는 것이 생겨나거든. 관계성이 많이 모이면, 그 의미도 한층 더 깊어지고 말야. 장어든 덮밥이든 생선구이 정식이든, 무엇이든 상관없다구. 알겠어?”

“… 말하자면 상대가 어떤 것이든 사람이 이렇게 살아 있는 한, 주위에 있는 모든 것과의 사이에 자연히 의미가 생겨난다는 거야.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연스러운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거지.” (상편 / p.365-366)


� “하지만 시간이라는 것이 있는 한 누구나 결국에는 훼손되고, 모습이 변하게 되는 건 아닐까? 조만간에.“

“설사 언젠가는 훼손된다 하더라도, 되돌아갈 수 있는 장소는 필요하지요.”
 “되돌아갈 수 있는 장소?”

“돌아갈 가치가 있는 장소라는 말입니다.” (하편 / p.42)


� “넌 이미 나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구.”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폐를 끼친다는 말은 하지 마.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거니까. 지금 와서 그런 얘기를 해보았자, 우리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어.” (하편 / p.71)


� 계시란 일상성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것일세. 계시 없는 인생이 무슨 인생이란 말인가! 다만 관찰하는 이성에서 행위하는 이성으로 뛰어 옮겨 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지. (하편 / p.91)


� “혼자 있을 때 상대를 생각하며 서글픈 마음이 된 적이 있어요?”

“물론” … “이따금 있지. 특히 달이 창백하게 보이는 계절에는. 특히 새들이 남쪽으로 건너가는 계절에는. 특히…….”

“어째서 물론이죠?”

“누구나 사랑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결여된 일부를 찾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다소의 차이는 있을망정 언제나 애절한 마음이 되는 거야. 아주 먼 옛날에 잃어버린 그리운 방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거지.“ (하편 / p.133)


� 결국 이 세계에서는 높고 튼튼한 울타리를 만드는 인간이 유효하게 살아남게 되는 거야. 그것을 부정하면 넌 황야로 추방당하게 돼. (하편 / p.169)


�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은 네 탓이 아니야. 내 탓도 아니고. 예언 탓도 아니고, 저주 탓도 아니지. DNA 탓도 아니고, 부조리 탓도 아니고, 구조주의 탓도 아니고, 제3차 산업혁명 탓도 아니야. 윌들이 모두 멸망하고 상실되어 가는 것은, 세게의 구조 자체가 멸망과 상실의 터전 위에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지. 우리의 존재는 그 원리의 그림자놀이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아. 바람은 불지. 미친 듯이 불어대는 강한 바람이 있고,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있어. 그러나 모든 바람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사라져. 바람은 물체가 아니야. 그것은 이동하는 공기의 총칭에 지나지 않아. 너는 귀를 기울이고 그 메타포를 이해하는 거야. (하편 / p.207-208)


� 요컨대 사랑을 한다는 건 그런 거야, 다무라 카프카 군. 숨이 멎을 만큼 황홀한 기분을 느끼는 것도 네 몫이고, 깊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것도 네 몫이지. 넌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그것을 견뎌야만 해. (하편 / p.235-236)


� 잘 들어, 싸움을 끝내기 위한 싸움이란 어디에도 없어. … 싸움은 싸움 자체 속에서 성장해 가거든. 그것은 폭력에 의해 흐른 피를 마시고, 폭력에 의해 상처 입은 살을 뜯어 먹으며 성장해 가지. 싸움이라는 것은 일종의 완전 생물이야. 너는 그것을 알아야 해. (하편 / p.303)


� 추억이란 당신의 몸을 안쪽에서부터 따뜻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당신의 몸을 안쪽으로부터 심하게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편 / p.308)


� 어떻게 죽느냐에 비한다면, 어떻게 사느냐 같은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람이 어떻게 죽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역시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하편 / p.345)

매거진의 이전글 [마감일기] - 내 삶을 영위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