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외국계 기업에 다니면 영어가 엄청 유창하고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뭐 틀린 말도 아닌데 그렇다고 100% 맞는 말도 아니다. 그럼 외국계 기업에서는 도대체 영어를 어느 정도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유럽계 기업(유니레버)과 미국계 기업(디즈니)에서 오래 근무를 했다. 주변 지인들도 대부분 이 두 경우라, 여기서는 서양에 기반한 외국계 기업에 한해서 얘기하기로 한다. 아시아계는 내가 잘 모르기에…
우선 유럽 회사와 미국 회사는 매우 다르다. 유럽 회사부터 얘기하자면, 유럽 회사는 본사 매출이 아주 크지 않다. 그럴 수가 없다. 나라가 작으니 매출 규모가 압도적으로 다른 나라를 누르기가 쉽지 않다. 유럽에서 매출이 아주 큰 나라라고 해도, 우리랑 경제규모가 엄청나게 차이 나는 건 아니라서 오히려 한국이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따라서 좀 더 다양한 나라를 인정해주는 분위기다. 그리고 본사가 영국이 아닐 경우, 어차피 자기들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건 우리랑 똑같고, 설사 영국이 본사라고 해도 우리가 영어를 이 정도 한다는 것을 오히려 인정해준다. 나는 유럽 회사 다니면서 내가 엄청 영어 잘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미국 회사는 단일 시장 매출로 미국을 이길 나라가 별로 없다. 굳이 꼽자면 중국이나 일본 정도? 그래도 대부분 자기네 시장인 미국 매출에 못 미친다. 따라서 미국 시장 외에는 다 international market이다. 물론 APAC, Europe, LATAM (Latin America)로 나누기도 하지만 거긴 다 미국 외 시장인 것이다. 영어는 당연히 전 세계 공통어니 자기들만큼 해야 한다는 전제조건 하에 얘기하니, 말이 빠르기도 하고 미국 사람들만 쓰는 표현이 나오기도 한다. 미국 중심으로 결정이 되기에 미국 외 국가에서 일하면 2등 시민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외국계 기업의 대명사인 미국 회사를 기준으로, 도대체 얼마나 영어를 잘해야 하는 걸까? 채용 인터뷰 시에는 꼭 영어능력을 본다. 그렇다고 완전히 미국 사람 같은 유창성을 꼭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 사람이 얼마나 영어로 듣고 말할 수 있는지 위주로 보며,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된다고 생각되면 오케이다. 미국과 교류가 많은 직종의 경우 영어능력을 매우 중요하게 보지만, 사실 외국계 기업의 한국지사는 한국 마켓만을 보기에 많은 직종에서는 한국 내 영업이나 관계가 중요한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간혹 영어를 정말 못 하지만 한국 내 역량이 좋다고 생각하면 채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니어 때와는 달리 위로 올라갈수록 영어가 안 되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결국 2등 시민으로서 올라 갈려면 본사에서 내 능력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미국 본사와의 관계 형성이나 내가 중요한 사람이란 걸 그들이 인정해야 하기에 위로 올라갈수록 영어가 중요해진다. 따라서 임원급이 꼭 다 외국인이거나 외국 국적자인 건 아니지만, 한국 사람이라도 영어를 잘하는 건 사실이다. 여기서 ‘잘한다’는 미국 사람처럼 얘기한다가 아니라, 영어로 정확히 알아듣고 잘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신기한 점은, 나이가 좀 있는 분들이 어린 시절 영어교육을 많이 받고 자라지 않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영어를 다들 하신다는 점이다. 얼마나 그분들이 열심히 노력하셨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사실 외국계 회사가 오히려 글로벌하지 않다. 왜냐하면 한국에 있는 외국계 기업은 “한국지사”이기에 한국 시장만 보고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진짜 글로벌 마켓을 보고 싶다면 오히려 한국 회사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외국계 회사에 있다가 다른 마켓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래 봤자 APAC (Asia Pacific) 정도이고 그것도 자주 있는 건 절대 아니다. 결국은 내가 무얼 하고 싶냐, 어떤 상황에서 일하고 싶냐로 귀결된다.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는 게 결국 정답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