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에서 을로 살기
나는 십여 년간을 큰 회사들에서만 일을 했다. 소위 말하는 외국계 대기업으로만 골라서 일했다.
외국계 대기업은 그 이름이 주는 브랜드밸류 덕분에 많은 회사들이 같이 일하고 싶어 한다. 그게 파트너십을 맺는 대기업이나 큰 회사들도 있지만, 광고 대행사라든지, 법무법인이라든지, 하물며 건물주도 외국계 대기업에서 들어오면 좋아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포트폴리오에 "저는 여기랑 했어요~"라고 본인의 브랜드 밸류가 약한 것을 외국계 대기업의 브랜드 밸류로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건물에 가더라도 1층에 붙은 건물 임차인 소개를 쭈욱 훑어보면 그 건물이 어느 정도 급인지 쉽게 알 수 있기에, 외국계 대기업은 건물주들도 (좀 더 저렴한 임차비용을 내더라도) 들이고 싶어 하는 곳들이다.
나는 외국계 대기업에 있을 동안에는 이걸 실감하질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속한 회사와 같이 일하고 싶어 했고, 이 회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물론 내가 돈을 지불하면서 쓰는 업체들이면 당연히 내가 원하는 바를 잘 들어주고, 좀 더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도 생각했다. 내가 부당하게 요구하는 건 없지만, 그래도 '이런 게 갑을관계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돈을 지불하는 쪽이 언제나 갑이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작은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했다. 사실 일도 재밌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좋은데, 놀라운 점은 내가 돈을 지불하면서 업체들을 쓰지만 내가 을이란 사실이다. 돈 내는 건 나인데, 눈치 보고 찰싹 기어야 하는 것도 나다. 아니, 이건 뭐지? 업체들도 작은 스타트업에서는 돈 나올 구석이 크지도 않고, 귀찮은 잔일도 많고, 이거 한다고 해서 자신의 포트폴리오에 한 줄 쓰지도 못할 거란 걸 잘 안다. 그러다 보니 돈을 받고 일하는 업체이면서도 세상에 이런 갑이 없다. 마음에 안 들면 안 하면 그만이란 식으로 배 째라는 것부터, 싫으면 계약 끊어버리라는 곳, 우리가 잘 모를 거라는 생각으로 후려치려는 자세까지...
사실 좋은 업체들도 많다. 이것저것 가르쳐주려는 곳도 있고, 우리 사정을 알고 너무 높지 않은 비용을 책정해 주는 고마운 곳들도 있다. 하지만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곳들이 갑 행세를 하니 참 갑갑할 따름이다.
결국. 아쉬우면 성공하라는 결론으로 돌아오는 것만 같다. 성공해서 다시는 그런 사람들이 무시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지.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고, 그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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