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024년 11월 21일 목요일
걱정 부자 엄마의 육아일기
목요일,
유일하게 아이가 태권도 학원만 있는 날.
아이는 아침부터 들떠있다.
"엄마 나 오늘은 학교 끝나고 바로 작은 도서관 갈래. 그리고 ㅇㅇ형이랑 만나서 놀아야지. 근데 그전에 나 내일 받아쓰기 시험 공부해야 하지?"
받아쓰기 시험 준비 이야기를 하며 들떠있는 기분이 약간 가라앉는다.
"이번 주 내내 하루도 받아쓰기 안 했잖아. 일단 집에 와서 한번 연습하고 나가."
오후 3시 30분, 아이가 태권도 학원이 끝날 무렵, 동네 친구와 함께 괜히 종이 박스를 들고 학원 차 앞으로 나가본다. 혹시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서 나오는지 보고 싶은 마음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
아이가 친하다고 이야기 한 남자 친구는 다른 친구와 함께 온다. 저 멀리 우리 아이는 혼자 차에서 내린다. 어쩐지 기가 죽어 보이기도 해 마음이 조여 온다. 그런데 어떤 여자 친구가 차에서 내린 우리 아이에게 착 가더니 무어라 말한다. 얼굴을 보니 어제 아이 짐들을 가지고 집에 오는 길에 동네 친구를 만나 벤치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눌 때 아이 짐을 알아보며 "총총이 가방이네. 얘 지금 어디 있지?" 하던 아이다. 뒤늦게 엄마를 발견한 아이가 여자 친구와 함께 다가온다. 여자 친구가 나에게 한 첫마디
"이모 오늘 총총이 학원 없잖아요. 같이 놀아도 돼요? 가방 놓으러 집에 안 들르고요! 가방은 놀이터 벤치에 놓고 놀다 가면 안 될까요?"
아, 새로 이사 온 동네에도 친하게 지나는 친구가 생겼구나. 다행이다 싶어 놀다 들어오라는 엄마 말에 아이는 얼굴이 환하게 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간다. 재미있게 놀다 오기를 바라며 집으로 들어온다.
4시 30분, 이제 들어 놀 때가 되었는데 꽤 오래 논다 싶어 창문으로 놀이터를 내려다본다. 저 멀리 그네를 타고 있는 아이가 보인다. 그네를 잘 못 타는 아이는 그네에 앉아 있고, 그 위에 친구 한 명이 서서 함께 그네를 타고 있다. 아까 그 여자아이는 아닌데, 다른 친구랑도 함께 노는구나 대견하다 생각하며 내 마음이 조금 놓인다.
5시, 이제는 들어오겠지 싶었는데 놀이터에도 없고 집에도 오지 않은 걸 보니 어디선가 신나게 놀고 있는 것 같다. 괜히 궁금한 마음에 동네 마트에 간다는 핑계 삼아 집을 나와본다. 아이는 지나가는 나를 보자마자 "엄마, 어디가? 나 ㅇㅇ이 형이 빼빼로 사줬어!" 주말 내내 함께 놀고 싶다던 형을 만나 기분이 좋은데 그 형이 빼빼로까지 사줬다니, 아이는 행복하다. 오며 가며 보니 우리 아이를 잘 챙겨주는 것 같아 고맙고 기쁘다. "고마워, 이모 지금 마트 가는데 뭐 먹고 싶니? 뭐 좀 사다 줄까?" 아이들 모두 괜찮다고 한다.
마트 앞에서 유치원생 아이를 키우는 동네 친구를 만났다. 이렇게 우연히 만나 밖에서 수다를 떤다는 핑계로 흘끔흘끔 아이가 잘 어울려 노나 본다. 잘 노는 것 같으면 또 마음이 놓인다.
5시 50분, 다리를 다쳤다며 집에 왔다. 성향이 맞지 않아 종종 부딪히는 아이 발에 차였다고 한다. 또 걱정이 확 들려는 찰나 아이가 말한다. "엄마 그런데 높은 곳에서 그 친구가 뛰어내려오다가 나랑 부딪힌 거야.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사과도 했어." 라고. 약을 바르고 또 놀러 간다는 아이를 막는다. "이젠 해도 졌고, 해야 할 일을 할 시간이야."
담임 선생님이 매주 1급부터 마지막 급수까지 문제를 돌아가며 내셔서 점점 할 것이 불어나는 받아쓰기 공부를 시키는데 지난주까지 계속 반복을 했던 것들이라 그런지 수월하게 끝났다. 앞의 급수들도 한번 더 확인하고 싶지만 놀이터에서 한참 놀다 온 아이도 몸살로 아픈 나도 피곤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이를 재우고 하루를 돌아보니 즐거움, 뿌듯함, 안도감 등의 감정들이 뒤섞인다. 자기 전 종알거리는 걸 들어보니 여자 친구가 일찍 집에 가서 놀이터에 있던 남자 친구들이랑 놀았는데, 그 친구들이 집으로 가니 좋아하는 형이 나와 함께 놀아서 너무 좋았다고 한다.
문득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놀이터 생활에 하루 기분이 좌지우지되던 때가 떠올랐다. 아이가 놀이터에서 속상해 들어온 날은 그다음 날까지도 기분이 나빴다. 외동에 예민하고 순한 성향을 가진 아이는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했는데, 나중엔 혼자 삐져 겉도는 아이를 보는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또 체구가 작아 덩치가 큰 친구들에게 치이고 오는 날이 많았다. 놀이터를 가기 직전에는 오늘은 무슨 일에 우리 아이가 상처받을까 싶어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돌덩이를 얹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교우 관계, 하루 일과를 속속들이 알 수 있던 유치원은 지나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얘가 뭘 했고 누구와 잘 지냈는지 너무 궁금한데 알 수가 없어 걱정이 눈보따리만큼 커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아무 문제없어. 총총이 잘 지낼 거야. 그만 걱정해"라고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남편의 말이 맞다. 아이는 잘 지낸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가끔 속상할 일, 억울할 일, 슬플 일이 생길 테지만 누구나 겪는 일이며 지혜롭게 이겨내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나는 그동안 아이의 "관계"를 너무 지나치게 걱정한 나머지 생기지도 않을 일들을 생각하며 그런 일들이 현실이 될까 봐 불안함에 너무 마음이 괴로웠다. 속상함, 억울함, 슬픔 등의 감정을 느낄 상황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늘 노심초사하며 지냈다.
엄마와 지내는 시간이 많아 내 성향을 빼다 박은 아이가 훗날 커서 엄마처럼 걱정과 불안에 빠져있기보다 아빠처럼 쿨하게, 자신 있게 지냈으면 좋겠다. 이제 힘들어도 어려워도 나부터 먼저 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