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력 거리 사회(High Power Distance Society)
TK, 권위에 순응하는 사회
“니, 경고 나왔나? 우리가 남이가?”
대구가 고향이고 경고(경북고)출신인 제가 50년이상 인생을 살아오면서 꽤 자주 들었던 이말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친근감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언제나 '위계의 시작'이라고 느껴왔습니다. 출신과 선후배 관계가 우선시되면서, 말투는 금세 반말로 바뀌죠. 그렇게 TK출신의 상대적인 사회적 위치는 자연스럽게 매겨집니다. 이는 단지 지역 특성이 아니라, '고위력 거리 사회(High Power Distance Society)’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위력 거리 사회'란, 권력이나 나이, 지위의 격차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죠. 윗사람의 말은 옳든 그르든 무조건 따라야 하며, 나이 많은 사람의 부당함도 '그래도 어른이니까'라는 말로 인정됩니다. 출신, 성별, 학벌, 직업, 직급, 배경, 나이, 집안에 따라 말할 수 있는 권리마저 암묵적으로 차등 배분되곤 합니다. "머라카노?" 한마디면 순식간에 정리되곤 하죠.
대구·경북, 이른바 TK 문화권은 그러한 위계 중심 문화가 매우 매우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습니다. 고등학교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처음 본 모대학 교수가 반말을 섞어가며 터무니없이 낮은 강의료의 시간강사직을 ‘베푸는 듯’ 제안하는 현실. 그 장면은 단순한 개인 경험이 아니라, 이런 문화의 상징적인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화 아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침묵합니다. 어른의 한마디면 논의는 종료되고, 조직 내 불합리한 구조에도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순응합니다. 마치 침묵이 미덕이고, 자기검열이 예의처럼 여겨지는 거죠.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70년대, 80년대가 아닙니다. 2025년, 새로운 시대죠. 제대로 나아가려면 고위력 구조와는 정반대의 질서가 요구될 겁니다. 위계를 중시하는 사회가 제대로 발전이 되겠습니까? 위계보다는 수평, 지시보다는 협업, 연고보다는 창의가 중심이 되는 사회. 실리콘밸리의 혁신 기업들이 수평적 조직문화와 자유로운 피드백 문화를 중시하는 이유는 명확하죠. 아이디어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발화되는 평등한 공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AI는 당신의 나이나 지위, 고향, 출신 학교를 보지 않습니다. 오직 당신의 경험, 생각, 질문, 창의성만이 평가되겠죠. 하지만 여전히 TK에서는 최저임금조차 무시되고, 연고주의에 기반한 기회 제공이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그것은 전통이 아니라, 미래로부터의 낙후입니다. 진정한 전통은 정신의 유연함과 인간에 대한 존중 속에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권위가 아니라 인격, 침묵이 아니라 표현, 따름이 아니라 성찰입니다.
대구, 경북지역이 제대로 발전하려면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의 관행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용기 있는 첫걸음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당당히 말하고, 부당함에 맞서며, 나이와 지위에 상관없이 인간 대 인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문화. 그것이 우리가 AI 시대에 도태되지 않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위력 거리 사회의 그늘을 벗어나, 모든 사람이 동등한 인격체로서 존중받는 사회. 그곳에서 우리는 인간의 진정한 가치와 무한한 잠재력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진짜 남이 아니게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