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자국퀴어 Sep 19. 2022

차와 거리의 감각

정한새




추석 때 아버지 집에 다녀오면서 새삼 생각했다. 강원도에 돌아가려는 마음이 강해지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차가 없어서는 아닐까? 하고. 지방이라고 다 같은 지방이 아닌 것처럼, 강원도라고 다 같은 강원도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나고 자란, 지금은 가족 중 아버지만 사는 곳은 면 단위의 농촌으로 한동안 성인 중에서 아버지가 제일 젊었을 정도로 고령화된 곳이다. 여전히 마을 어디에 서서 주변을 둘러봐도 논과 밭, 산이나 물 중 두 가지 이상을 볼 수 있다. 버스 정류장은 마을에서 그나마 내가 자란 집에 제일 가까운데, 10분 정도 걸어 가야 하고, 버스는 하루에 여섯 대가 다닌다.

몇 년 전 추석 때, 아버지랑 싸웠다. 사실 싸웠다기보다 (대부분 가정에서 그렇듯이) 아버지가 잘못했고, 내가 그것을 지적했으나 (대부분 가정에서 그렇듯이) 아버지는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화가 나서 그 집을 떠나 내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는데, 어머니가 나를 역으로 태워주지 않아서(당시 나는 면허가 없었다) 결국 끔찍한 기분으로 그 집에 있어야 했다. 쓰고 나니 가정폭력이네요, 그때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습니다만.

그때도 여기는 차 없으면 살 곳이 못 되는구나, 생각하긴 했지만 이번에 2박 3일간 있다 보니 그 생각이 강해졌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 마트도 없고, 은행도 없고, 카페도 없고, 서점도 없고, 도서관도 없고, 식당도 없다. 위에 언급한 것과 비슷한 장소라도 가려면 차를 타고 30분 정도 가거나, 자주 오지도 않는 버스를 갈아타고 1시간 정도 나가야 한다. 알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이 정도 산골에 살면 들어오는 버스 노선은 하나나 두 개뿐이고, 자주 오지 않기 때문에 온 동네 사람을 다 태워서 가야 한다. 필연적으로 버스 노선은 말도 안 되게 꼬불거릴 수밖에 없고, 다들 마을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거나 그 마을과 마을 사이를 도는 버스 안에서 만나기 마련이다.

한 번 버스를 타고 나가면 다시 돌아올 버스를 타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15분에 한 대씩 오는 버스? 그런 건 꿈이다. 따라서 시내를 나가게 된다면, 모든 볼일을 잘 기억해뒀다가 한꺼번에 처리하고 그로 인해 생긴 짐을 양손 가득 들고 버스 정류장에서 내가 탈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잔뜩 긴장했다가, 나올 때 탔던 그 사람들이 타고 있는 버스를 타고 돌아는 것이다. 내가 살던 동네의 할머니는 아침 버스를 타고 나가 15분에서 30분 정도 진료를 받고 버스 정류장에서 다시 돌아갈 버스를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곤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딘가로 갈 때 20분, 30분 정도 걷는 건 특별히 멀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그 정도 걷는 건 일상이었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도 걸어가야 했고, 초등학교까지도 걸어서 그 정도는 걸렸고, 내가 살던 ㅇㅇ리에서 동급생이 살던 ㅁㅁ리까지는 그것보다 더 걸렸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데도 그랬다. 수도권에 살면서도 한동안 배달 음식 문화에 익숙해지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걸어서 15분이면 갈 수 있는 곳에 있는 음식을 시키는 게 이상했다.

경기도로 이사 온 뒤에 주말에 한 번씩 서울에 갈 때마다 할 일을 정리해 나가는 게 별로 이상하지 않았다. 리에서 동으로 나가는 단위가 시에서 특별시로 바뀐 것뿐이었다. 게다가 지금 사는 아파트는 단지 앞에 버스 정류장이 바로 있고, 두 자릿수 정도의 서로 다른 버스 노선이 다닌다. 15분 정도 걸으면 지하철역도 갈 수 있다. 도보로 20분 거리의 회사도 걸어 다닌다. 서울에 살 때는 서대문구에서 마포구까지 산책 삼아 걸어 다니곤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그 정도 거리를 어떻게 걸어 다니냐고 했다. 나야말로 의문이다. 그 정도도 안 걸으면 도대체 언제 걷나요?

사는 곳이 다르면 거리의 감각조차도 달라진다는 걸 새삼 느낀다. 우리 가족은 차를 타는 게 당연했다. 차가 없으면 출퇴근을 할 수 없었으니까. 길 가다가 얼굴 아는 마을 사람을 태워주는 것도 당연했다. 그때 태워주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래 기다렸다 버스를 타야 할지 알기 때문이다. 자가용은 기본이고, 농사짓는 데 가장 필요한 트럭의 짐칸에 타고 다니는 것도 일상이었다. 때로는 아버지가 운전하는 경운기 짐칸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산을 오르거나 내리기도 했다. 경운기는 특히 오르막에서 속도가 무척 느린 편이라 앉아있는 게 지겨울 때면 뛰어내려서 경운기랑 속도를 맞춰 뛰다시피 하다가 지치면 짐칸에 올라타기도 했다. 그렇게 온갖 탈 것을 섭렵하며 자랐는데, 생각해보니 거기에 대중교통은 버스 하나 뿐이다.

몇 주 전, 모 주간지에서 기후 위기 전문가와 인터뷰하며 지하철 사용을 언급한 적이 있다. 차를 타지 않고 지하철을 타는 게 탄소 중립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거다.     

지금 우리나라 교통혼잡비용이 연간 68조원입니다(2018년 기준). 국방예산보다도 많아요. 저는 수도권과 강원도 구석구석까지 GTX와 KTX가 연결되면 탄소중립이 실현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왜 못하냐. 예비타당성조사 때문에 그렇죠. 거기에는 탄소 배출 관련 가격이 포함되지 않았거든요. 탄소 배출량을 계산하면 KTX는 어디든 다 흑자일 겁니다.
최초의 기후위기 외교관 최후의 대안을 내놓다, 이오성 기자, 시사IN 제778호     

서울시에만 지하철역이 300개가 넘게 설치되어 있다. 언급된 강원도청이 있는 춘천시에는 춘천역과 남춘천역 두 군데뿐이다. 교통에 대한 감각은 그저 불편함의 문제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더 넓고 더 멀리, 때로는 미래까지 간다. 모든 정체성이 그러하듯이.




헤더 출처 - Rishiraj  Parmar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2706436/

작가의 이전글 추석 휴재 공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