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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인 Jan 31. 2024

술 권하는 여자

 



  혀에 맴도는 백세주의 맛이 부드럽고 달콤하다. 빈속으로 술을 느리게 흘려보낸다. 오늘따라 술이 당겨서라기보다 내 안을 파고드는 정체불명의 미풍과 마주하고 싶어서다.

  칼칼한 매운탕을 보면 텁텁한 것들 다 밀어내 버리는 소주가 생각나고, 모락모락 김 오르는 어묵탕을 보면 포근함 가득 차오르는 정종이 떠오르고, 파르르 푸름이 새긴 파전을 보면 거침없이 걸걸해지는 막걸리가 절실해지고, 온몸 기름기를 걷어낸 건어물을 보면 맘껏 가벼워지는 맥주가 당기듯, 마음이 우울하거나 살랑거려도 떠오르는 술을 오늘도 가까이 두고 있다. 아니 ‘척’을 내본다.

  나의 지인들은 거의 술을 생각하지 않는다. 술맛을 모르는 것인지 그것이 안고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을 찾지 못하는 것인지 누군가 술 얘기를 하지 않으면 그저 밥이나 먹고 수다나 떨다 맹숭맹숭 헤어진다. 그런 날에는 옆구리로 파고드는 소소리바람과 함께 터벅터벅 걸어 집에 온다.

 어디서든 술 얘기를 먼저 꺼내는 건 나다. 사람들은 내가 술을 무척 좋아하는 줄 안다. 그래 놓고 기껏 마신다는 게 소주 서너 잔이다. 술을 마시기도 전에 다음 날 온종일 괴롭힐 두통이 먼저 아른거려서다. 쾌락이 머무는 시간보다 그 뒤에 다가오는 고통은 더 힘겹고 길다. 그래서 술잔을 앞에 두고 항시 머뭇거린다. 그러고 보면 나는 술이 아니라 술자리의 허심탄회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결혼 전, 사랑 표현에 적극적이지 못한 남자친구는 내게 불만이 있으면 술의 힘을 빌렸다. 갈지자걸음으로 자취방 골목 어귀에 와서는 확성기라도 든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사랑한다 000, 사랑한다!”

  동네 개들이 합창하듯 일제히 짖어댔다. 곳곳에선 툭툭 터지는 불빛이 어둠과 고요를 갈랐다. 드르륵 열리는 창문마다 둥그런 형상들이 허공을 더듬었다. 마침내 장년 남자의 굵고 갈라진 고함과 쏘는 듯한 시선이 비틀거리는 그와 부서지는 내 마음으로 꽂혔다.

  나는 황급히 대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당장이라도 그에게서 도망가고 싶었지만 밤새도록 내 이름을 불러댈까 불안해 그의 몸을 끌고 먼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한동안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나의 시간에서 지울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었다. 곤드레만드레 취해 길바닥에 엎어져 있던 시골 동네 아저씨들의 모습이 그의 미래상으로 연상돼 나는 끝내 그를 놓아버렸다. 그리고 완벽한 남자를 선택했다. 대대손손 알코올 유전자가 제로인 집안의 남자를.

  술이 술을 부른다는 걸 잊어간 건 아마도 남편을 만난 후부터 일 것이다. 남편과 난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알콩달콩 그럭저럭 잘 살아왔지만, 가끔은 옛 남자친구의 주정(酒酊)이 그립다. 자신을 다 뒤집어 보여주는 진실이 아무래도 그 지점에 있어 보여서다.

  남편에게는 당장에 닥친 일과 미래의 행복만이 중요하다. 지금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지, 어딜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아내인 나의 마음이 어떤지, 어디로 걸어가고 싶어 하는지 아랑곳하지 않는다. 내면이 곪아 소리를 질러대도 모른 척한다. 그저 앞만 보며 달릴 뿐이다. 어쩌면 남편은 이성으로 무장한 채 흔들리지 않는 ‘척’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주변에 눈길 한번 제대로 준 적 없이 뛰었다. 삶이 마를 대로 마른 중년의 어느 한 날, 친구들과 일탈을 시도했다. 결혼, 주부, 아내, 엄마라는 얽매임을 한순간이나마 던져버리고 싶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자갈길을 달리는 수레 소리보다 더 시끌벅적한 곳이었다. 그날, 그 밤에 알았던 양주의 알싸한 맛을 잊지 못한다. 강도 높은 술이 식도에 번지던 날카로운 쾌감, 거나하게 취해 피폐한 나를 버리고 싶었던 그날의 또 다른 나도 기억한다. 한 잔의 위스키가 건들던 바닥에 깔린 아픔까지도.

  맨정신으로 언제나 사물을 똑바로 인식하며 사는 삶이란 얼마나 힘겹고 재미없을까. 때론 도취와 망각으로 사회적인 자신을 버리고 본래의 나로 돌아가 자유로워지는 것도 괜찮겠다. 내 안 깊숙이 가라앉은 찌꺼기들을 술의 힘으로 확 뒤집어 걸러낸 후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와 가벼움을 맛볼 수 있을 테니.

  느긋하게 음미하며 한 잔씩 마신 술이 어느새 따뜻이 몸 안으로 퍼진다. 술이 창자를 휘도는지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죽은 감각들이 실타래 풀리듯 서서히 빠져나와 너울너울 춤사위를 펼친다. 그 순간 나를 옥죄던 긴장이 사라지며 가뿐해진다.

  이제 제대로 취할 시간이다. 그대, 한잔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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