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자들의 행복을 위하여
언제라고 말하면 특정 세대를 겨냥하는 것 같아 밝힐 수 없지만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논리가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갈등상황이 되면 소리부터 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전철에서도 마을버스에서도 슈퍼에서도 식당에서도 카페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아직도 종종 본다.
- 사장 나와!!!!!!!!!!!!
- 무슨 소리하는 거야?? 잠자코 내 말부터 들어!!!
@@년 전만 해도 순하고 조용한 성격의 사람들은 그들의 공격에 꼼짝없이 당하기 일쑤였다. 눈물만 뚝뚝,
네네네 만 나지막하게 속삭였던 거다.
하지만 요즈음 확실히 세상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
나는 나이가 많지도 적지도 않은 세대이지만 20년 전 아니 10년 전이랑만 비교해도 확실히 목소리 큰 놈들이 목소리로 이겨먹는 시기는 이제 간 것 같다.
큰 목소리보다는 조곤조곤한 말투,
센 눈빛과 인상으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전술보다는
차분하게 감정을 다스리며 탄탄하게 준비해
일갈을 날리는 조용한 성격의 사람들이 이기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는 거다.
오랜 시간 목소리 큰 놈들에게 당하고 당하고 또 당하면서 쌓인 한에 더 이상 당하고 살 수만은 없단 용기가 더해져 조용한 사람들도 언제부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용할지라도 나름의 논리와 전술로 고유 영역을 지키고 원하는 것을 쟁취하게 된 것이다.
조용한 사람들이 멍청해서 그동안 당하고만 살았던 게 아니다.
조용한 사람들 중 보통 평화를 사랑하는 성격의 소유자들이 많고 워낙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다보니 갈등상황 자체에 처하는 경우가 잘 없기에 갈등에 대처하는 강단 같은 것이 적었을 뿐이지,
사실 목소리만 큰 쪽보다 조용하게 상황을 관찰하는 사람들이 훨씬 똑똑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
사실 내가 조용한 쪽이다. 그래서 자꾸 자랑같은 글을 쓰고 있다.
낮에 카페에 갔다가 새치기를 당했는데 상대가 목소리가 큰 사람이었다.
보통 싸우기 싫어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은 나의 뒷자리에 선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제가 먼저 왔어요.
말하자 상대는 삼백안을 치켜뜨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먼저 온 게 어딨어요, 증거 있어? 딱 봐도 어린 게 어른이 몸이 힘들면 먼저 주문할 수도 있지 싸가지 없게 어쩌고저쩌고...... 리플레이 하고 싶지도 않다.
이걸 어째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뒷사람들이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 뒤로 가세요.
- 질서 지키셔야죠.
뒷사람들 중 목소리가 큰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아무도 그 상대와 똑같이 그를 상대하지 않았던 거다. 다들 조곤조곤 할 말을 했다.
그리고 못지않게 조용하고 순해 보이는 인상의 종업원이 나를 보며 말했다.
- 손님 주문하시겠어요?
승리.
나의 승리.
상대가 뭐라고 종업원에게 소리쳤지만 종업원은 차분하게 나의 주문을 받았고, 뒷사람의 주문을 받았다.
그러는 사이 목소리만 크던 그 사람은 뭐라고 시부렁대며 가장 뒤로 가서 줄을 섰다.
긴 세월 승리하며 살던 목소리 큰 사람들과 같은 세월 숙이고만 살다가 이제야 서서히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뭐라고 칭해 구분해야 할지 모르겠다.
MBTI에서 E와 I의 차이라 볼 수도 없고 속한 말로 꼰대와 꼰대가 아닌 사람이라 구분할 수도 없고,
그냥 인성의 문제라 보는 게 가장 정확한데 목소리가 크다고 다 인성이 나쁜 건 아니니 그것도 정확한 기준은 되지 못한다.
인싸(insider)와 아싸(outsider)로 나눌 수도 없다. 인싸라고 무조건 시끄러운 것도 아니고 아싸라고 무조건 조용하지도 않을 뿐더러 조용한 인싸도, 막무가내로 우기고 보는 아싸들도 여럿 봤다.
용기있는 악인과 소심한 선인 정도가 바른 표현일지.
어쨌든 조용하고 순한 사람들의 승리경험이 늘고 돈이 많다고 권력을 가졌다고 모든 질서를 무시한 채 세상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시절은 조금씩 밀려나는 것 같아 굉장히 만족스럽다.
물론 아직 그런 부분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훨씬 나아졌고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
선한 사람들이 85%이고 악하고 교활한 사람들이 15%라면 예전엔 15% 소수가 세상 모든 목소리를 차지하여 85%는 그저 평화가 좋아서 큰 소리 나지 않게 일을 처리하는 형국이었는데 요즈음엔 85%의 선한 사람들도 목소리를 내고 15%의 악랄한 인간들을 신랄하게 비난한다. 그것도 하나씩 보면 조용하고 미약한 목소리들이지만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같은 sns를 통해 응집되다 보니 합쳐진 목소리는 결코 미약하지가 않다.
신난다.
권력과 대범한 성격으로 교실 분위기를 휘어잡던 일진들이 다수의 평범한 학생들이 모여 내는 목소리에
제대로 당하는 모습을 보는 느낌이랄까?
나같은 사람은 예전 같았으면 줄을 서는 맛집은 근처도 못 갔을 거라 예상된다. 치고 들어와서 내가 먼저 왔는데 네가 먼저 왔다는 증거 이쒀???!!!!!!! 외치는 사람들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밀려났을 거다. 요즘은 테이블링 어플이 있어 보다 합리적이고 편하다.
특가에 파는 물건들은 구매개수 제한이 있어 나처럼 조용하고 느린 사람들도 몫을 챙길 수 있고, 부르는 게 가격인 어느 가게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을 뜯겨도 인터넷 커뮤니티에 공익을 위한 글을 쓰거나 소비자보호원에 신고하는 등 여러가지 구제방법이 존재한다.
누군가에게 외모나 성격으로 조롱당해도 증거만 차곡차곡 모으면 모욕죄로 신고가 가능하고, 어느 조직이든 상담문화가 활성화되는 추세라 속으로만 참던 말들을 소리내어 뱉을 기회도 예전보다 훨씬 많다.
소심한 선인들을 위한 이런 노력들을 악용하는 사례만 조심하면 될 듯한데 그런 악인들을 걸러낼 방법 또한 다양하게 나올 거라 믿는다.
목소리만 낼라치면 메애애애애애.....양 목소리가 나와 누구 앞에서도 누가 뭐라해도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하던 내가 나이가 들면서 조금 덜 소심해진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이 요즈음 예전보다 편안한 게 오로지 나이 덕분만은 아니다. 확실하다.
내향형이자 소심하고 목소리 작고 어디를 가도 아싸인, 어리숙하고 찌질한 나의 눈에 세상은 분명히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실시간으로 주고 받아야하는 말보다 충분히 생각하고 천천히 글로 마음을 표현하는 게 편한 나같은 사람들이 직장에서든 친구사이에든 학교에서든 길바닥에서든 어디서든 말로 누구랑 붙을 일이 없으면 좋겠다. 그럴 용기도 내고 싶지 않고 언성을 높이느라 에너지를 쓰고 싶지도 않다.
그래도 나같은 사람들이 한번씩 용기내 내는 목소리로, 기력을 쥐어 짜내 악인들에 맞서는 배포로,
85% 선인들의 세상이 조금씩 나아진다면 나도 앞으로 종종 목소리만 큰 놈들에게 맞설 생각이다.
카페에서 새치기하던 사람에게 무기력하게 양보하지 않은 것처럼, 부당한 일에 목소리를 내고 조금씩 바로 잡는 것이 나보다 어리고 소심한 선인들을 위해
어른으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의무인 것 같다.
일단 당근마켓을 통해 필요한 사람에게 주려고 올려둔 블루투스 스피커를 오늘 저녁 8시 전까지 자기 집으로 배달해달라는 당근거지부터 물리쳐야겠다.
이 글을 마무리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채팅에 임할 거다.
이 또한 소심하고 목소리 작은 선인들을 위해 내디디는
의미있는 한발짝이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