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성 Aug 05. 2024

미라클 포레스트 #2

유차장이야기1

그런 적 없습니다. 저 정말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지난 3주 동안, 유차장이 수십번도 넘게 반복했던 말이다. 주희를 붙잡고, 팀장을 붙잡고, 또 인사부장을 상대로, 나아가 본부장과 부대표, 끝에는 대표까지 붙들고 토로했으나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40년 인생 처음으로 느낀 억울한 감정이었다. 그런 오해를 받아본 적이 없어 더 쉽게 무너졌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상황이 악화되자 억울함은 식음을 전폐시키고, 몸 이곳저곳에 염증을 만들더니 원형탈모와 빈혈, 급기야 부정맥까지 유발했다. 모두가 주희의 말만 듣고 믿었다. 


전 차장님한테 당했어요. 그 뿐이에요.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 먼저 고백을 한 건 주희였다. 마케팅 업무가 처음이라기에 두어번 업무적 도움을 준 게 다인 관계였다. 스물 여섯, 갓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의 첫 발을 뗀 신입이 마흔살 이혼남더러 좋다니, 당연히 믿을 수 없었고 농담 섞인 진담을 담아 그녀를 거부했던 유차장이다. 하지만 주희는 좋게 말해 적극적, 나쁘게 말해 집요했다. 결국 유차장은 그녀를 받아들였고 둘은 3개월을 만났다. 여느 사내커플들처럼 비밀 데이트를 하고, 퇴근 후엔 맛집들을 찾아다녔으며, 주말이면 영화를 보거나 서울 근교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 8년 전 이혼하고 모든 관계를 닫고 살았던 유차장으로선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동료들의 시선을 피해 눈이라도 마주칠 때면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고, 볼일만 보고 나오던 화장실에서 괜히 거울도 한번 보게 되었으며, 처음으로 왁스도 사고, 팩도 사고, 헬스 회원권도 끊었더랬다. 남들 눈에야 어린 여자 만나는 구닥다리 아재로 보였을지언정 유차장의 마음은 누구보다 진심이었고 봄처럼 설레었다. 


 3주 전, 주희가 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며 인사상담을 신청하기 전까지는. 


 지난 달 소개팅을 했다는 주희는 다음 달 상견례를 앞두고 있었다. 상대 남자는 검사인지 판사인지 변호사인지 아니 의사인지 약사인지 변리사인지 회계사인지 무사인지 마술사인지 뭔지 어쨌든 서른 초반의 전문직이라고 했다. 언젠가 회의실에서 단둘이 있던 순간 주희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가 같은 부서 최대리에게 걸린 게 딱 3주쯤 전이었던 것 같다. 최대리는 회사의 대표 TMT로 통한다. 부서를 가로지르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 Too much talker.


 수능을 망쳤을 때도, 목표했던 기업에 입사하지 못했을 때도, 아버지가 폐암 판정을 받았을 때도, 결혼 반년만에 아내가 이혼장을 내밀었을때도 이번처럼 무너지지는 않았다. 파렴치한이라는 비난. 밝히게 생겼다는 외모비하. 바람펴서 이혼당했다는 근거 없는 손가락질과 열 살 넘게 어린 애가 여자로 보이냐는 뒷담화, 아니 앞담화. 인격모독. 따돌림. 유차장은 이 모든 치욕들을 사내 인사조정위원회가 열리기도 전에 겪어야했다. 조사관들은 교도관이 죄수를 대하는 시선으로 그를 샅샅이 훑었다. 혐오가 얇은 막이 되어 1초에 한겹씩 유차장을 덮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 순간 억만겹의 혐오에 짓눌린 유차장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힘을 주지 않고는 숨쉬는 것조차 버거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인사조정위원회가 예정되었던 그 날 아침, 세면대 거울 속에서 인상 더러운 성폭행범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유차장은 거울 속 혐오범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 주희와 만나기 시작하며 끊었던 신경안정제가 3개월치 모여있었다. 한주먹씩 알약을 삼킬 때마다 휘황찬란한 섬광들이 눈 앞을 가로막더니 일순간 모든 게 뒤섞여 암흑이 시작되었다.


 정신을 차린 유차장은 암흑을 벗어나기 위해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걷고 또 걸어 얼마나 걸었을까, 매연인지 짙은 안개인지 모를 뿌연 공기와 오로라인지 신기루인지 모를 형광색 빛줄기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폭풍우. 진흙바닥. 빗줄기가 멈춘 다음 짙은 풀내음. 유차장의 시선에서 미라클 포레스트는 한적한 여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유차장은 간만에 숨을 쉬는 것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싱그러운 여름의 풀벌레 소리, 청량한 여름 공기는 죽어있던 그의 감각들을 깨워 간지럽혔다. 눈코입귀, 그리고 피부로 유차장은 미라클 포레스트를 만끽하며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낯선 카페 하나가 그의 시선으로 들어왔다. 숲의 신비로운 분위기와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모던한 느낌의 카페. 금속 재질의 외벽에는 양각으로 글씨가 새겨진 게 보였다. Cafe Ewon.


 출입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