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설(濕雪)

생활부장의 추억

by Applepie
김금희-'복자에게'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을 읽다가 가슴에 탁 와닿은 구절을 만났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판사인데 판사의 직업이 가진 태생적인 속성, 그리고 그로 인한 힘겨움에 대해 선배가 주인공에게 얘기해주는 부분이다.


고작 1년이었지만, 학폭 담당을 할 때의 내가 저런 기분이었다. 절차상 받은 학생 진술서와 학부모 진술서를 읽는 것 조차 힘겨웠다. 종이를 뚫고 나오는 억울함, 상대를 향한 적의 등 온갖 감정의 무게에 깔릴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실감했다. 분쟁을 담당하는 일이 가진 힘듦이 진짜 크구나 하는 것을.


그걸 저렇게 적확하게 표현하다니- 눈을 계속 맞는, 습설의 삶. 그 뒤에 나오는 눈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으려면 빨리 털어내야 한다는 것도 생활부장이 갖춰야할 덕목으로 꼽힌다. 생활부장을 몆년이고 하시는 분들을 보면 저걸 잘 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눈을 맞아도 별 타격이 없고 금세 털어내시는 분들. 나같은 범인들은 고작 1년 하고 뒷걸음질치는데 말이다.


2023년 여름, 서이초 사건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안타까운 교사들의 희생이 있었고 교사들은 동료의 죽음을 계기로 뭉쳤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달라 외쳤다. 그러나 결국 아직도 학폭은 교사 손을 떠나지 못했다. 그러니 1년씩의 이 릴레이를 언젠간 또 내가 받아야 할 해가 올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나는 이 소설을 떠올릴수 있을까? 난 지금 단지 눈을 맞고 있는거라고 알아주면 좋겠다. 우리나라에서 눈은 사계절 내리는 게 아니라고, 맞더라도 털어내면 되는거라고. 단지 우두커니 서서 쏟아지는 눈을 하염없이 맞지만 않으면 되는거라고. 나중의 내가 그렇게 소설의 장면을 지나듯, 우아하게 눈을 툭툭 털어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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