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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리 May 13. 2024

오페라 <나사의 회전>과 선함의 비극

통제욕구와 통제불가능성에 대하여

2024.5.12 관극로그


오페라 <나사의 회전(The Turn of the Screw)>

우리 학교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오페라를 올린다. <나사의 회전>은 영문학과를 다니던 시절 읽었던 소설이라 오페라 버전이 궁금해서 보러 가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헨리 제임스(1843-1916)라는 작가가 쓴 작품인데, <여인의 초상>으로 유명한 그의 작품 세계는 인간 사회에 팽배한 통제욕과 그 실질적 통제불가능성을 탐구하곤 한다.


고딕 호러 장르의 <나사의 회전>은 내가 특별히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고딕 호러 장르에 크게 재미를 느끼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고딕 호러는 주로 어두운 분위기의 배경에서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며, 초자연적인 현상과 신뢰할 수 없는 화자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화자의 정신 건강이 의심되기 때문에 그가 경험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서도 판단이 갈릴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나는 열린 해석을 추구하는 듯한 형식에 비해 독자로서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많이 없다고 느껴서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다. 사건에 대한 디테일이 많이 떨어지곤 하는데, 그래서 화자가 자신의 상황 판단을 독자에게 전해줄 때 그렇구나 하면서 따라가지지가 않았다.



오페라 <나사의 회전>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우선 극은 한 남자가 자신이 발견한 일기장의 이야기를 전해주겠다고 하며 시작한다. 그 일기장은 22살의 젊은 여자가 쓴 것으로, 그는 블라이라는 고택의 가정교사로 고용되어 간다. 그곳에서 어린 남매를 돌보게 되는데, 두 남매는 한없이 천사 같은 모습이다. 그러던 와중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낯선 이가 드나들 수 없는 저택인데 가정교사는 모르는 남녀를 자꾸만 보게 되고, 어느 날 갑자기 남자아이의 퇴학 통지서가 도착하는데 그 안에는 불미스러운 일에 아이가 연루되었음이 적혀있다. 낯선 남녀의 정체를 파고들던 가정교사는 그들이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 저택에서 아이들과 가까이 지내던 하인 퀸트와 이전 가정교사였던 제셀의 유령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평판이 좋지 않았으며, 자신이 도착하기 전 죽었음을 알게 된다. 간혹 알 수 없는 불길한 단어들을 이야기하던 아이의 말들이 퀸트와 제셀에게서 온 것으로 정황이 의심되기 시작한다. 사악한 유령들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려는 가정교사의 필사적인 노력은 여자아이가 그를 피해 도망가고, 남자아이가 그의 품 안에서 죽어버리는 결과로 막을 내린다.



학부 때 <나사의 회전>을 읽고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의 눈으로 극을 보는데, 그 내용이 완전히 새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왜 작가는 아이들이 진짜 선한지 악한지 독자가 생각해 보기 어렵도록 아이들에 대한 묘사를 최소화했을까?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몰라서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 유령은 대체 왜 등장하는 걸까?라는 궁금증이 있었는데, 이제 알 것 같았다. 극은 아이들에 대한 내용도, 유령에 대한 내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순수하고 선한 존재로 보고 싶고 그렇게 만들고("지키고") 싶은 마음, 선과 악의 분리, 그리고 그 안에서 결국 가정교사가 추구했던 건 본인의 선함에 대한 증명이라는 것. 그리고 그 모든 통제의 불가능성과 파괴성. 여기에 초점을 두고 보니 많은 것이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학부 때 읽었던 다른 단편소설이 떠올랐다. <주홍글씨>로 유명한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의 <The Birthmark>(1843, 출생점)라는 작품이다. 이야기의 화자는 모든 게 완벽한 여자를 만나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사는데, 외모부터 품성까지 모든 것이 가히 완벽한 그 여자의 얼굴에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점이 하나 있다. 다른 면이 모두 너무 완벽하기에, 화자는 점점 더 그 점에 집착하게 된다. 저것만 없으면 될 텐데 하고. 그리고 각고의 노력 끝에 결국 그 점을 지우는 데 성공하지만, 점이 없어지는 순간 여자는 죽어버린다.


두 작품에서 보이는 건, 살아있는 것에는 쉽게 가치판단 할 수 없는 다양한 면들이 반드시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선과 악을 확실히 구분해서 악을 통제할 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살아있는 게 아닌 것. 나아가, 애초에 선과 악이란 게 명확히 구분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악을 '파괴'하는 것이 선이라면 그것은 선인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선이라는 허상을 지키고자 하는 가정교사의 시도는 모든 걸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이들에게서 선한 것만을 보았던 것은 선의 존재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투사한 것이므로. 악이란 게 아이들 안에 이미 함께함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 의식적인 세계 안에서 존재가 지워진 그 악은 유령의 형태로 화자의 세계를 침범해 온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과도 연결된다. 통제 불가능한 것을 제거했을 때 그 억눌린 것은 환영, 환청의 형태로, 절대로 통제되지 않는 모습으로 현상계를 반드시 방문한다는 것. 통제에 대한 믿음은 사실 현실 도피와 상상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기에, 외면한 현실은 반드시 언젠가 눈앞으로 치고 들어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여성 서사를 추구하면서도 여성성=무해함이라는 논리를 거부하는 홍상수 감독의 <도망친 여자>(2020)라는 영화도 생각났다. 무해함이라는 개념이 완벽히 무해할 수 있을까?)


<나사의 회전>에서도 <The Birthmark>에서도, 그리고 헨리 제임스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통제 욕구는 늘 사회적 권력에서 우위를 점한 사람으로부터 열위에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발현된다. 남성에게서 여성에게, 어른에게서 아이에게, 선생으로부터 학생에게. 권력관계란 수직적 서열 구조를 통해 우위의 사람에게는 열위보다 반드시 모든 면에서 더 나아야 한다는 불안을, 열위의 사람에게는 스스로의 능력과 비전에 대한 의심을 주어 모두를 불행하게 한다. 그 서열을 현실의 반영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구조에 붙잡힌 사람들은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린다. 애초에 서열이란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아닌 타인을 통해 가시화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증명은 끝이 없다. 모든 인간은 완전히 다른 존재라서 그 어떤 객관적인 비교도 성립하지 않을뿐더러, 타인이란 그야말로 완벽히 내 통제 밖에 놓인 살아있는 것이니까.


실제로 무대는 모든 장치나 소품이 최소화된 상태에서 올라갔는데, 그래서 상상/허상이라는 <나사의 회전>의 요소가 더 잘 살아나는 것 같았다. UCI에서 올리는 오페라는 학생극이고, 연기 위주로 훈련받는 학생들이라, 조금은 학예회가 떠오르는 정도의 준비도를 보여주는 저예산의 경험용 극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사의 회전>이 정말 잘 고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포는 상상을 통해 가장 제대로 살아날 수 있고, 관객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주니까 말이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내 삶을 완전히 바꿔놓은 멘토가 있다. 그는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시기에 나타나서 내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동안 많은 교수님들을 만나 여러 가지 형태로 지도를 받았지만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요구하거나 기대하거나 방향성을 제시해주지도 않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 멘토의 존재 자체만으로 나는 연구, 수업, 인간관계, 인생 모두에서 엄청난 전환점을 맞이했다. 새장에서 풀려난 기분이었다. 그는 타인에 대한 어떠한 기대도 가정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마음껏 좋아하는 즐거움에 겨워했다. 너무 특별한 사람이라, 팬층도 두텁고 그의 이름만 언급되면 무표정이던 사람들의 얼굴이 한순간 확 풀릴 정도로 온 세상이 그를 사랑하는데, 그는 그에 대한 어떠한 의식도 관심도 없다. 보답에 대한 손톱만큼의 기대 없이 자신이 즐거워서 사랑하니, 그 애정을 돌려받을 때면 주체할 수 없는 놀라움과 기쁨에 어쩔 줄 몰라한다. 이쯤이면 익숙할 텐데 싶은데도 정말 주체가 안 되는 그 표정을 보면 오히려 내가 놀랍다. 통제와 비교와 증명과 타인에 대한 기대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멘토를 만나고 내 수업에서도 점점 힘이 빠졌다. 강의경력 5년 차인데도 나는 학생들에게서 답을 구하려 하면서 영원히 알 수 없는 내 강의의 효용에 대한 의심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멘토의 도움으로 학생들에 대한 추측을 그만두고 오로지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내 즐거움만 챙기면서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가나 돌려받을 애정에 대한 걱정 없이 마음껏 아이들과의 만남을 즐거워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마침내 한 톨 남았던 통제에 대한 믿음마저 털어버렸을 때, 행복이 물밀듯 밀려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모든 순간과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이 전부 소중한 우연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행복했다. 그리고 전에 어떠한 의도를 되새기며 내용을 전달했을 때는 학생들에게 와닿지 않는 것 같다고 느꼈는데, 언젠가부터 가장 별생각 없이 얘기했을 때 강의실 공기가 훅, 바뀌며 학생들이 숨을 죽이고 집중해서 다음 말을 기다리는 순간들이 생겼다. 아이들의 웃음이 터지는 순간도 늘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다.


그래서 확신하게 되었다. 내가 오로지 챙길 수 있는 건 나의 행복이고, 나와 타인의 관계는 통제의 영역에 조금도 들어와 있지 않음을. 각자가 스스로의 행복을 잘 챙기는 것이 사실은 서로에게 닿는 길이란 것을. 의식적으로 뻗어나가고 예상하고 단정 짓는 것은 현실과 조금도 관계없는 상상의 영역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사의 회전>을 보면서 통제라는 키워드가 그렇게 머릿속에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이 타인에 대한 기대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그런 기대가 오면 또 흘려보내는 것, 통제욕이 치솟으면 그 욕구를 내 것으로 잘 알아봐 주고 또 보내주는 것. 그것까지는 할 수 있는 영역인 것 같다.


전날 <나사의 회전> 첫공 인터미션 때 연출가가 객석에서 지인들 대상으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며 불평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연출가는 아마도 지인들의 평가가 어떨지 자신의 머릿속에서 가정하고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었을 것이다. 체면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지금 보이는 하잘 것 없는 것보다 내 진짜 수준은 훨씬 높다고. 하지만 그 상상 속 지인들의 평가는 사실 온전히 자신의 눈으로 평가된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연출가는 스스로가 가진 것을 봐주기보다는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더 크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통제는 연약하기 때문에 발현된다. 그리고 그의 지인들은 그가 올린 무대의 수준이 아니라 그 연약함을 사랑할 것이다. 그 사랑이 그가 스스로 가진 것 안에서 무한히 행복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수 있다면 정말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내 상상 안에서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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