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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리 Oct 12. 2024

근대미국희곡으로 <세일즈맨의 죽음> 읽기

심리적 사실주의, 현대비극, 극단적 소비주의 

근대미국희곡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할 첫 작품을 저는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정했습니다. 근대미국희곡이라는 장르의 효시로도 볼 수도 있고, 형식과 주제 면에서 깔끔하게 분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세일즈맨의 죽음>을 심리적 사실주의극, 현대비극, 젠더라는 세 각도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극의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2막으로 구성된 이 극의 기본 틀은 한 가정의 집 안에서 펼쳐지는데요. 극 중 시간은 집 안에서 흐르고 있지만, 주인공인 윌리 로먼의 회상을 통해 주로 집 밖의 이야기들이 그려집니다. 가족의 구성은 윌리와 아내 린다, 그리고 아들 둘인 비프와 해피입니다. 서부에서 농부 일을 하던 비프가 집에 돌아온 날 밤부터 이야기가 펼쳐지는데요. 세일즈맨인 윌리는 이 직업의 화려한 말년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일생을 그에 투자한 것으로 보입니다. 영업직으로서, 개인의 매력을 이용하는 법을 배워서, 모두가 찾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생업까지 편하게 해결되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화려함, 인기, 보이는 것에 대한 추구는 첫째 아들인 비프에게 그대로 투영되어, 비프는 전형적인 '잘 나가는' 학생 시절을 보냅니다. 윌리의 회상 속 비프는 아버지가 심어주는 화려한 꿈들에 매료되어 아버지를 매우 잘 따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주치기만 하면 으르렁대는 현재의 관계와 비교되지요. 둘째 아들인 해피는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러려니 하며 아버지와 형을 열심히 따라다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참 비프가 잘 나가던 시기, 화려했던 그들의 과거 모습에는 도덕이나 양심의 결여가 눈에 띕니다. 윌리는 비프의 도벽을 부채질하고, 착실한 옆집 이웃인 찰리와 그의 아들 버나드를 대놓고 무시하면서도 버나드에게 윌리의 시험을 대리로 쳐줄 것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출장이 잦은 세일즈맨인 윌리의 외도를 비프가 알게 되면서 둘도 없었던 부자 관계는 완전히 틀어지게 됩니다. 비프는 그때부터 잘 나가는 것에 대한 의욕을 잃고 성실함마저 배우지 못한 채 떠도는 인생을 삽니다. 윌리 또한 나이가 들수록 인맥이 쌓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닥나면서, 꿈꿨던 화려한 인생의 정반대인 빚더미 속 초라한 인생이 되어갑니다. 비프가 집에 올 때마다 윌리는 그를 자신이 이룰 수 없었던 꿈에 대한 마지막 희망으로 보며 집착하고 몰아세웁니다. 


극의 시작부터 윌리의 정신상태는 상당히 불안정합니다. 첫 장면부터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세일즈맨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장시간 운전 중 자꾸 정신을 놓아 위험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곤 과거 회상에 빠져들어 혼잣말을 하고, 환상 속 아들들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내 린다는 아들들에게 아버지를 잘 챙겨야 한다며, 그의 자살 시도 흔적들을 알려줍니다. 


1막은 그러한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발동한 비프가 윌리를 위해 괜찮은 직장을 구하려는 마음을 먹으며 희망적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2막에서 이 마지막 희망이 완전히 부서집니다. 비프는 자신의 과거 인맥들이 좋은 쪽으로 왜곡된 기억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지연을 통해 직장을 구해보려는 시도가 물거품이 되지요. 같은 날 윌리는 평생을 몸담은 직장에서 퇴직금도 연금도 없이 해고됩니다. 그의 불안정한 정신상태와 저조한 실적이 문제시되고, 그를 해고한 사장은 윌리의 친구였던 이전 사장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와의 친분과 인정에 끝까지 호소해 보지만, 지금의 고용주는 녹음기라는 새로운 기계에 정신이 팔려 윌리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습니다. 


윌리의 환상을 지켜주는 것이 그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해피와 린다와 달리, 비프와 이웃 찰리는 그에게 현실 직시를 하게 하려고 합니다. 비프는 윌리에게 또박또박 현실을 말하는데, 그에 대해 윌리는 상당히 공격적으로 반응하며 환상 속에서 살겠다고 말합니다. 찰리는 윌리에게 자신의 밑에서 일할 수 있도록, 그래서 많지는 않아도 고정적인 수입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려 하지만, 평생 그를 무시해 왔던 윌리의 자존심은 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점점 더 심해지는 환상 속 윌리는 언젠가 아프리카의 정글, 알래스카의 광산으로 떠나 일확천금을 거둔, 그의 형 벤의 목소리에 더욱 빠져들게 되고, 보험금이라는 또 다른 일확천금을 생각하며 차사고를 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윌리는 꿈을 이룬 걸까요? 그의 죽음은 그가 평생 믿어온 가치를 지키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을까요?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당시 실제로 비슷한 죽음들이 잦아서, 아서 밀러가 주변인들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쓰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시대상황을 잠깐 짚어보겠습니다. 극은 1949년에 초연하여 같은 해 퓰리처상과 뉴욕 희곡 비평가상을 받고, 742번의 무대를 하고서야 첫 막이 내리게 될 정도로 즉각적인 공감을 얻어냈습니다. 지난 포스트에서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미국이 급부상하던 배경을 설명했었는데요.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의 수익으로 급격히 낙관적이고 화려해진 미국의 분위기 속에서, 곧 30년대 대공황이 이어지게 됩니다. 그야말로 구름 위에서 아스팔트 바닥으로 그대로 추락하는 듯한 거품의 꺼짐이었지요. 뉴딜 정책과 2차 세계대전으로 조금은 회복하던 당시, 미국은 전쟁으로 인해 혼란한 시대 상황을 자본주의와 소비의 화려함을 부각하여 덮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극에는 물건에 대한 가치가 인간의 가치를 능가하게 된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 여기저기 담겨있습니다. 이 극단적인 소비지상주의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도 가장 자주 상연되고 또 각색되는 극 중 하나인 <세일즈맨의 죽음>인데요. 무엇이 그렇게 이 극을 특별하게 만들었을까요? 


우선 초연 당시 무대 디자인을 볼게요. 


이 무대를 어떻게 표현하시겠어요? 무대 아래쪽은 상당히 사실적인 집안의 모습을, 위쪽은 얼기설기한 지붕의 모습으로 나타나지요. 그리고 디자인 스케치를 보면 왜곡된 빌딩 숲의 거친 모습이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열심히 집이라는 공간을 꾸리려 하지만, 구성원을 외부의 위험에서 보호해 줄 지붕이 휑하니 뚫려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지붕 너머로 들어오는 외부의 각박한 환경이 인물들을 압도하고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 줍니다. 현재 시점의 현실과 과거의 환상을 넘나드는 소재에 맞게, 무대 또한 사실적인 표현과 시적인 표현이 각각 뚜렷이 구분되면서 혼합되어 있습니다. "심리적 사실주의극"이라고 일컬어지는 미국 특유의 장르를 잘 보여주는 무대입니다. 


"심리적 사실주의극"은 사실주의적 표현을 선호하는 미국에서 발달한 장르입니다. <인형의 집>과 같이 아주 건조하고 사회비판적 색채가 강렬한 유럽의 사실주의와, 또 유럽에서 출범한 실험적인 사조인 표현주의가 결합되어 사실적이면서도 시적이기도 한 그런 장르가 탄생한 것입니다. 


표현주의는 사실주의를 거부하며 등장한 장르인데요. 그만큼 사실적 표현이나 전형적인 희극의 구성, 즉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나, 섬세한 인물의 구성, 그럴듯한 인과관계의 배치 등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처음 표현주의가 미국에 들어오면서 이를 효과적으로 소화한 극작가로 유진 오닐과 손튼 와일더가 있는데요. 그들의 작품을 하나씩 소개하겠습니다. 



유진 오닐의 <The Hairy Ape (털보 원숭이)> 초연 무대. 산업 사회에서 인간성의 상실을 동물원에 갇힌 유인원에 비유해 표현합니다. 


손튼 와일더의 <우리 읍내(Our Town)> 2017년 공연 무대입니다. 작은 마을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 결혼하고 죽은 후까지의 삶이라는 큰 내용을 마임으로 표현합니다.


보시다시피 표현주의는 강한 상징적 특성과 실험적 측면이 있는데요. 극단적인 주관적 시선을 추구하는 표현주의와 최대한의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사실주의가 결합한 "심리적 사실주의"는 적당한 정도의 현실적 디테일과 적당한 시적 표현이 합쳐져서, 전반적으로 보편적, 대중적 감성에 잘 와닿을 수 있는 장르가 됩니다. <세일즈맨의 죽음>만 하더라도, 전쟁과 경제 대공황 같은 구체적인 시대 상황은 적절히 지워지고, 무대 또한 너무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신선한 재미를 준다는 점에서, 여러 문화권에 공감받고 재해석될 수 있는 극이 되었지요. 



<세일즈맨의 죽음>이 가지는 어떠한 보편성과 공감력에 대해 또 다른 시선으로 풀어보겠습니다. 바로 '비극'인데요. 작가 아서 밀러는 실제로 이 극을 '현대비극'으로 소개하면서, <세일즈맨의 죽음>을 통해 고대 비극의 감성을 현대에 맞춰 재해석하고자 했던 의도를 "비극과 일반인(Tragedy and the Common Man)"이라는 글을 통해 설명합니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은 늘 왕족이었고, 높은 지위의 인간이 그들을 보호하는 지위적 껍데기들이 벗겨지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민낯을 그대로 마주해야 할 때의 초라하고 무력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대중으로부터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장르였습니다. "비극과 일반인"이라는 글에서 밀러는 이렇듯 추락하는 인물의 지위가 꼭 높은 왕족일 필요는 없다고, 일반인들 또한 여러 가지로 추락을 경험하며, 그 현실을 좀 더 잘 알아차리고 얘기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썼다고 말합니다. 고대 비극이 신으로 비유되는 어떠한 커다란 세상의 운명적 힘이 인간 개인이 가지는 자유 의지를 압도하는 이치에 대해 그린다면, <세일즈맨의 죽음> 또한 개인이 평생을 바쳐 일군 가치들이 더 큰 사회의 흐름 속에서 무력화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고대 그리스 비극이 세기를 거듭하면서 공감받는 이유가 어떠한 인간의 보편적 경험을 그려냈기 때문이라고 본다면, 현대비극으로서 <세일즈맨의 죽음>도 그런 관점에서 명작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여기서 젠더에 대해 조금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밀러는 종종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보인다는 비판을 받곤 하는데요. '비극과 일반인' 그리고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man'이 여성을 배제한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실제 고대 그리스 비극이 다분히 남성적인 장르였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세일즈맨의 죽음>을 자세히 보면, 윌리가 아내 린다를 폭력적이고 차별적으로 대하는 모습들, 그의 외도, 그리고 아들 해피의 여성편력이 굉장히 문제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공감보다는 반감을 유도하도록 구성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세일즈맨의 죽음> 속 성차별적 장면들은 밀러가 당연하게 그린다기보다는 오히려 문제제기를 하는 장면들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겠습니다. 


저는 이것을 50년대 극단적 소비주의와 연결 지어 설명드리겠습니다. 50년대면 <세일즈맨의 죽음>이 상연된 1949년을 바로 뒤따라오는 시기이기에, 당시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는 사례라고 생각해요. '50년대 가전 광고'라고 구글에 검색해 보면 알록달록 예쁜 광고 전단과 영상들이 수두룩하니 뜨는데요. 몇 가지 소개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인상적인 부분들 몇 가지를 짚어보겠습니다. 

1. 늘 깔끔하게 차려입은 집안의 가족 구성원들

2. 밖에서 일하는 정장 입은 남성 가장, 앞치마를 두르고 예쁘게 화장한 가정주부 아내, 그리고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행복하게 노는 모습으로 대표되는 행복한 가정의 이미지 

3. 깔끔한 남성의 모습이 '야만적' 흑인의 모습과 대비되며 '백인성'과 이상적 가정의 모습을 연결 

4. 가전제품을 여성 해방과 연결 지어 표현함과 동시에 구매력을 여성이 아닌 남성에게 부여하는 표현 

5. 아버지가 총기류를 소년인 아들을 위해 구매하는 내용, 갓난아이도 콜라를 마실 수 있다는 말, 담배 피우는 산타클로스 


아주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요. 이것은 당시 전쟁이 끝나고 군인들이 돌아오면서 혼란한 사회 상황을 수직적인 질서의 확립을 통해 안정화하려는 의식적 노력이 반영된 것입니다. 전쟁 동안 사회에서 일할 남성 인원의 부족으로 여성의 사회 활동이 증가했었는데요. 전쟁이 끝나고 남자들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기존의 가부장적 사회 질서가 흔들릴 위기에 놓이고, 그에 더해 또다시 닥쳐올 경제 대공황에 대한 불안과 전쟁 후의 트라우마와 같은 부정적 감성들이 꿈틀대고 있었지요. 이때 정부는 기술의 발전을 기회삼아 극단적인 소비를 조장하게 됩니다. 다양한 불안과 공포를 소비가 주는 만족감으로 덮고자 한 것이지요. 지금의 사회에서 스트레스를 소비를 통해 풀고, 문 앞에 놓인 택배 박스를 통해 진정시키는 것과도 연결된 심리 같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비의 단위를 남성을 가부장으로 하는 핵가족으로, 또 그 핵가족을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표현하여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입니다.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돌아가자면, 극에서는 반복적으로 자동차, 세탁기, 주택 융자 등 과거 윌리와 린다가 즉각적인 만족과 광고의 메시지들을 믿고 구매했지만 몇십 년간 끝나지 않는 할부와 교묘히 계속 발생하는 수리 비용으로 진땀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대놓고 윌리는 광고에 속았다고도 이야기하고, 그것은 그가 과거에 광고의 환상에 팔려 자랑스럽게 자동차를 타고 다니던 모습과 대비됩니다. 또한 광고에서 팔았던 것은 어떠한 '자유'에 대한 메시지인데요. 현재의 윌리와 린다를 보면 그들은 소비를 통해 해방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발이 묶여 끝없이 돈이 새는 빚의 늪에 빠진 모습입니다. 


플룻 소리로 대변되는 윌리의 아버지의 존재, 윌리와 비프의 관계, 이웃 찰리와 버나드, 윌리에게 형이 가지는 무게감 등등 남성 사회 속에서도 굉장히 수직적인 질서가 보이고, 그 질서 속에서 남성 일원들이라고 자유로워보이지 않습니다. '세일즈맨'이라는 직업의 매력이 그를 좌지우지하는 상사 없이 개인의 매력으로 승부를 본다는 멋진 아메리칸드림의 대표 이미지이기도 한데요. 극 중 윌리는 그 자유와 개인성 속에서 결국은 방향과 길을 잃고 자신을 인도해 줄 죽은 형의 목소리에 목을 매게 되고, 한편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아랫사람의 가이드는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즉 <세일즈맨의 죽음>이 그리는 사회는 이처럼 조장된 소비와 엄격한 사회 질서를 막연히 따르던 한 가정이 결국은 행복에 달하는 길을 찾지 못한 채 그 간극이 주는 좌절과 충격의 깊이가 상당한 곳입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특별한 계기 없이도 목숨을 버리는 선택을 하게 될 만큼요. 


저는 수업을 준비하면서 이 극이 읽을 때마다 다른 울림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최근 다소 심한 망상증을 겪는 상사들과 일하면서 고민이 많았고, 취업 시장에 나가있는 지금 제 스스로가 망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을 최고조로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울림이 있었을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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