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죽음과 망상과 현실 사이에서 길을 잃고 폭발해버린 남부의 낭만
<세일즈맨의 죽음>에 이어 깊이 들어가 볼 오늘의 극은 밀러와 같은 시기 이름을 떨친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Tennessee Williams, 1911-1983)의 대표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A Streetcar Named Desire)> (1947)입니다. 지난 포스트에서 <세일즈맨의 죽음>을 현대비극으로 소개했었는데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도 비극의 요소를 강하게 갖추고 있어 밀러와 비교가 가능하지만, 한편으로 날카롭고 사색적인 밀러와는 다른 폭발적이고 강렬한 인물들의 에너지가 극을 이끌고 간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우선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극은 블랜치라는 다소 과하게 화려한 귀족적 모습의 인물이 낡고 허름한 뉴올리언스의 작은 동네에 도착하며 시작합니다. 곧이어 그가 여동생을 찾아온 것임이 밝혀지고, 동생 스텔라는 폴란드계 미국인이자 일반 노동자인 스탠리와 결혼하면서 귀족적 배경을 버리고 이곳에 잘 적응해서 사는 인물임이 드러납니다. 시작부터 블랜치와 매제 스탠리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돕니다. 말론 브란도가 스탠리 연기로 무명 배우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메소드 배우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는데요. 그만큼 스탠리는 아주 강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짐승적이고 거칠면서, 현실적이고 건조한 남성의 모습입니다. 첫 등장부터 '나방 같은' 모습으로 묘사되는 블랜치의 낭만을 좇는 꿈 꾸는 듯한 분위기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지요. 등장하자마자 블랜치는 더 이상 자신이 젊은 여성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과도한 인지와 불안을 보이고, 외모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가는 곳마다 조도를 낮추고, 불안한 모습으로 계속 술을 마시며 반복적으로 목욕을 하고 향수를 뿌리지요. 스탠리가 맨몸의 이미지라면, 블랜치는 가림막을 겹겹이 쌓아 자신을 두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모습에 스탠리는 당장 경제적 문제부터 확인합니다. 블랜치와 스텔라의 드부아 가(家)의 대저택인 '벨 리브'를 '잃었다'라고 표현하는 말에 블랜치가 그 돈을 혼자 차지하려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며 사람들을 통해 뒷조사를 합니다.
극은 블랜치가 숨기고 있는 것이 서서히, 조금씩 드러나면서 진행됩니다.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을 보이며 장황한 말로 자신을 표현하는 블랜치지만, 실은 가문이 몰락하면서 무일푼으로 지역에서 쫓겨났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스스로를 포장하던 고고하고 우아한 모습 이면에는 집착적으로 낯선 남자와 수많은 관계를 맺고(이것이 매춘이었는지는 애매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가르치는 십 대의 학생과 얽히는 바람에 영문학 교사였던 직장에서도 해고된 배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집도, 직장도, 가족도, 이웃도 모두 잃은 채 마지막으로 찾아온 것이 동생의 집이었는데, 이곳에 와서도 여유 있는 귀족인 척 자신을 포장하며, 잠깐 방문하러 왔다는 말이 무색하게 머무르는 시간을 계속 연장하며 스텔라 부부의 공간을 자신의 취향대로 바꿔놓습니다. 전반적으로 계속해서 스탠리와 그의 동네를 무시하며 여러 공간 연출을 통해 이곳의 '수준'을 높이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와중에 '미치'라는 이름의, 정중함을 갖춘 스탠리의 친구를 유혹하여 결혼하고자 하는데요. 순수하고 깨끗한 아가씨의 모습을 연출하여 결혼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미치를 속이려고 하지만, 스탠리가 미치에게 블랜치의 과거를 폭로하면서 이 계획이 무산됩니다.
스탠리와 블랜치의 갈등이 점차 고조되던 중 스텔라는 스트레스로 조산을 하게 됩니다. 스텔라가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간 사이, 두 사람은 단둘이 밤을 보내게 되는데요. 미치를 잃은 블랜치는 망상으로의 회피가 최고조에 달한 상태입니다. 이때 블랜치는 이제 모든 것을 알게 된 스탠리와 정면으로 맞붙게 되고, 스탠리는 특유의 가차 없는 현실성으로 블랜치의 모든 망상과 회피와 방어를 조각조각 뜯어 파괴해 버립니다. 이는 스탠리의 블랜치 성폭행이라는 암시로 상징됩니다.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다음 장면에서, 이제 완전히 현실 감각을 잃고 망상 속으로 회피해 버린 블랜치는 정신병원으로 연행됩니다. 블랜치의 그날 이야기를 들은 스텔라는 이전과 같은 감정으로 스탠리를 대하기 힘들어하지만, 동시에 스탠리가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는 부정의 말에 흔들립니다. 극은 이들의 삶이 그냥 이렇게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며 끝납니다.
보신 바와 같이 다소 약한 존재감의 스텔라를 사이에 둔 스탠리와 블랜치의 힘겨루기가 긴장감을 가지고 극을 이끌어 갑니다. 누가 봐도 곧 쓰러질 것 같은 불안정한 에너지의 블랜치에 대비되는, 정글의 왕에 비유되는 무지막지한 스탠리의 모습은 관객이 블랜치에 조금 더 이입하고 응원하며 극을 따라갈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블랜치 또한 그다지 호감을 이끌어 내는 모습은 아닌데요. 눈에 보이는 거짓말들과, 손님으로 신세 지면서도 동생 부부에 대한 우월감과 하대를 보이는 것, 그리고 강박적으로 십 대 소년들을 부적절하게 유혹하는 경향이 블랜치의 편을 들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스탠리의 승리로 극이 끝나는 것은 오로지 블랜치가 약해서라기보단 그들의 줄다리기가 스탠리의 영역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 크지요.
그렇다면 블랜치는 왜 이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를 치러야 했을까요? 다시 비극으로 돌아가면, 뉴올리언스로 비유되는 스탠리의 '동물적' 세상은 변화하는 시대를 반영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스탠리의 세상의 존재보다도 실은 블랜치의 세상의 소멸에 있습니다. 블랜치는 여러 면에서 미국 남부의 이상을 반영합니다. 노예제를 두고 일어난 19세기 후반 미국의 남북 전쟁을 기억하시나요? 그만큼 미국 남부는 노예제와 플랜테이션을 기반으로 하는 굉장히 뚜렷한 귀족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노예제의 폐지는 그들이 일궈온 삶의 모습과 가치들을 무너뜨리는 일이었지요. 결국 남부는 패전하고 노예제는 폐지됩니다. 몇 세기동안 쌓아 올린 귀족 사회의 권위가 무너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지요. 그래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오랜 기간 서서히 블랜치 드부아 가(家)의 남부 대저택이 그들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상황을, 그래서 블랜치는 누린 것 하나 없이 명예와 우월감만 주입받은 채 그에 일치되지 않는 현실 안에서 처참한 마지막 모습을 다 마주해야 했던 인물로 그립니다.
"구(舊) 남부 (Old South)"라는 이름은 지금도 낭만적인 느낌과 연결될 정도로 특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몇 가지를 살펴볼까요?
여섯 개의 커다란 기둥이 받치고 있는 커다란 흰 저택
그 저택이 그저 한 부분을 차지할 정도의 넓은 마당
가장자리에 위치한 노예 거주 공간과 플랜테이션 (주로 목화밭)
고상하고 우아한 귀족 사회
충실하고 헌신적인 하인들
정원 파티와 무도회
낭만적인 남부의 분위기가 조금은 상상이 가시나요? 이러한 전반적인 남부의 풍경과 가치들이 하나의 인물에 투영된 것이 "Southern Belle", 즉 '남부 미인'이라고 불리는 여성상이었는데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가 바로 대표적인 남부의 매력적 여성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라지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소설 또한 과거 남부의 영광이 사라지는, 그런 급격한 사회 변화의 충격과 여파를 그리고 있는데요. 그러한 절망 속에서 스칼렛은 꿋꿋이, 조금 다른 형태더라도, 사라져 가는 남부만의 가치를 지켜나갈 희망으로 그려집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랜치는 전형적인 '남부 미인'입니다. 중간중간 암시되는, '벨 리브'라는 우아한 프랑스식 이름의 기둥 있는 큰 대저택과, 블랜치가 지키려 하는 귀족적 삶의 방식과 우월주의가 이를 반영합니다. 그런데 이 극에서 '벨 리브'는 영광이 아니라, 수치와 공포를 주는 존재입니다. 노예제 폐지 후 플랜테이션을 운영할 자원이 없는 상태로 드부아 가(家)는 대저택을 조금씩 저당 잡아 귀족적 삶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털어서 쓴 '벨 리브'는 마침내 드부아의 손을 떠나고, 그에 기여한 조상들의 일련의 죽음을 블랜치 혼자서 다 감당했던 것입니다. '구 남부'가 몰락하면서 그 생존에 대한 집착의 의무를 '남부 미인'이 떠맡게 되었음을 보여주지요. 끝없는 장례식을 주관하면서 블랜치는 죽음의 근접성을 느끼며 극단적인 두려움과 공포를 가지게 됩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영국 초연에서 비비안 리가 블랜치 역할을 맡았고, 영화화되면서 역시 비비안 리가 미국 배우 대신에 이 역할을 맡게 됩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남부 미인' 스칼렛의 이미지로 대중에게 각인된 비비안 리이기에, 구 남부의 몰락이라는 중요한 모티브를 다소 암시적으로 다룬 이 극에 직관적인 이해를 주기에 적합한 캐스팅이었지요.
이 배경을 알고 나면 더욱이 블랜치에게 감정이입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노예제와 같은 비인간적 전통과 밑도 끝도 없는 우월주의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인물이니까요. 그러면서도 고결한 귀족적 선민의식에 충실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타인을 비난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지요.
그럼에도 우리가 블랜치에게 좀 더 자연스럽게 이입이 되는 이유로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가 그녀에게 자신을 많이 투영했음을 들 수 있습니다. 윌리엄스 자신도 남부 출신이었고, 엄격한 아버지와 정신적으로 불안한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며 정신적 아픔을 많이 겪은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동성애가 금기시되던 시절, 성소수자로서의 죄의식이 윌리엄스의 중요 작품들을 이끌어가는 가장 강렬한 감춰진 진실이 됩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블랜치가 병적으로 집착하는 어린 소년은 그녀의 결혼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인데요. 십 대 어린 나이에 사랑에 빠져 결혼했지만, 곧 그가 동성애자임을 알게 되고, 블랜치는 더 이상 모른척하며 살 수 없어 참다못해 충동적으로 그에게 비난하는 말을 뱉어냅니다. 그 즉시 남편은 총을 입에 물고 자살해 버리고, 이어진 평생 동안 블랜치는 그 죄의식과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마음에 얽매여 지금에 이릅니다.
성소수자의 삶의 모습이 무대에 처음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 1968년 <The Boys in the Band>이니, 그 20년 전인 윌리엄스의 시대에는 이것이 극을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도 아주 조심스럽게, 암시적으로만 등장합니다. 주인공 블랜치와 이미 죽어버린 앨런이라는 전남편은 그의 분리된 자아로도 보입니다. 자신의 성적 지향을 스스로 혐오하며 죽여버릴 정도의 파괴성을 나타내는 앨런, 그리고 그것을 여전히 욕망하며 멈출 수 없음에 죄의식을 쌓아가는 블랜치.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이라는 덫에 걸려 스스로 감당이 안 돼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적나라하게 보여주듯, 노예제에 기반한 남부 귀족 사회는 여러 병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무너져 마땅한 전통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그 무너짐 이후에 따라오는 사회의 모습은 무정부 상태와도 같은, 스탠리의 동물적이고 폭력적인, 이전의 남부 못지않게 문제점이 많은 곳으로 그려집니다. 노예제 폐지라는 목표를 가지고 전쟁을 벌였지만,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치밀하게 고민되어있지 않았던 것이지요. 다음 포스트에서는 그 이후 펼쳐진 사회의 모습을 다룬 <태양 속의 건포도>를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