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서 사랑하는 마음
선거 후 친구들이 많이 슬프다. 체한 친구도 있고, 무기력과 우울에 짓눌린 친구들도 많다. 선거와 관계없이 잘 지내는 친구들도 있다. 어떤 마음인지, 별 마음이 없는지, 그 친구들에게서는 아직 듣지 못했다. 나는 잘 지낸다.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다. 하지만 친구들이 슬프고 우울해서 마음이 아프다.
이번에는 당선인 차례라고 생각했다. 대단한 예측은 아니었다. 설마설마 그런 사람이 되겠어? 하는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지지하지 않지만 그가 될 차례라고 느꼈다. 혐오와 여성비하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나라가 됐지만, 혐오와 여성비하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아닌 사람들도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당선인에게 표를 줄 때 단순히 혐오와 여성비하에 찬성해서 그를 뽑지는 않았을 거란 말이다. 부동산, 빚, 물가, 전쟁에 대한 두려움(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을 통해 촉발된 북한과 중국에 대한 두려움) 등등 각자가 가장 강하고 중요하게 느끼는 어려움과 불안을 앞에 두고 그것을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이를 선택했을 거다. 각자의 이유는 개인이 자라온 환경이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그것이 정치성향에 투사된다. 그러니 그 표가 상징하는 것은 셀 수 없이 많은 마음과 개인의 역사적 이유들이다.
내가 이전의 선거 결과보다 타격이 없는 이유는, 부모님 특히 엄마에 대한 두려움, 미움, 분노, 억압이 많이 해소됐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와 언니와 정반대 성향의 사람인데, 나와 반대되는 성향의 두 사람에게 사랑과 연민을 느끼게 되면서 나와 반대의 정치성향에 대한 미움이 많이 줄었다. 내 안에도 있는 엄마와 언니로 대변되는 면모와 화해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조금 더 정확할 것 같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엄마와 언니와 반대이지 않았다. 늘 힘세고 빠르고, 나보다 서열이 높은 두 사람을 따라가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늘 어려웠다. 어떻게 해야 따라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추구하고 누리는 힘을 나는 가족에서 가져본 적이 없었고, 누구도 나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다. 둘의 힘의 원천인 공부와 돈(부동산, 증권 등), 위계와 경쟁에 대한 긍정이 가족 관계에서 가장 약자인 나에게는 폭력과 억압으로 다가왔다. 무시당하고, 맞고, 비난받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쌓인 슬픔과 울분이 상당했다. 하지만 슬픔과 울분을 해소하는 방법을 모른 채 자랐다. 내가 나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했다. 엄마와 언니를 쫓아가려 늘 아등바등했던 시간이 참 길었다. 두 사람을 부정하면서도 닮고 싶었다. 기득권이라고 칭해지는 것들의 속성을 싫어하면서도 동경했다.
나는 첫 선거에서 이회창을 지지했다. 엄마가 투표소 줄에 함께 서서 나에게 말했다. “꼭 이회창을 찍어야 돼. 넌 다른 생각 마.” 그 말을 들었을 때 반감이 불쑥 들었던 게 기억난다. 하지만 그 반감과 별개로 나는 그에게 한 표를 주었다. 그 후에는 늘 반대를 찍었다. 내 안에 쌓인 분노와 고통의 표출이었다. 날 아프게 한 사람과 그 사람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복수였다.
내가 돈을 벌고,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자 나는 더욱더 두 사람과 반대의 삶을 살았다. 기득권과 성공한 사람들의 반대로, 내가 동경하면서도 나를 억압했던 성향에 대한 반동으로 살아갔다. 반동으로는 슬픔과 고통이 해소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원인을 살피지 않은 반동은 슬픔과 고통을 더 강화했다.
반동으로 살아가다 벽에 부딪히고 나락으로 떨어졌던 해부터 상담을 통해 나와 공감하는 법을 더디게 배워갔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과정을 통해 지금의 성향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이해가 생겼다. 내가 지지하는 가치, 내가 중요시 여기는 것들의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역사와 이유를 알게 됐다. 내가 지지하는 것들이 합당하고, 이성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옳다는 마음으로 살았는데, 내가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다는 걸, 인간은 이성과 합리로 사는 게 아니라는 걸, 내가 느낀 슬픔과 울분으로 내 생각과 신념을 강하게 옹호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치유되어 가면서 나만의 이유들에 강한 감정을 싣거나 정당화하지 않게 됐다. 혐오와 차별, 폭력에 반대하는 마음은 여전히 잘 간직하고 있고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살아갈 거다. 왜냐하면 나는 나만의 역사로 그런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사람이 굳이 될 필요는 전혀 없다. 하지만 나는 ‘나’라고 믿는 나와, 그런 내가 가진 이 마음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하다거나, 강하게 찬성하거나, 합리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마음의 반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강한 미움을 가지게 되지 않는다. 내가 나만의 안경을 끼고 있다는 걸 안다. 안경을 써도 나지만, 안경을 벗어도 나다.
이혼을 통해 깨달았다. 국가와 제도는 그 안에 속했을 때는 보호받고 지원받고 그것이 당연한 도덕으로 여겨지지만, 그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을 때, 나가보려 할 때는 나를 가로막는 감옥이자 폭력으로 느껴진다. 국가와 제도라는 구분은 나를 지켜주기도 하고 나를 파괴하기도 한다. 내가 국가와 제도를 사용하려는 방법과 태도에 따라, 그때 그때 나의 상태에 따라 국가와 제도에 대한 내 감정, 찬성과 반대 같은 입장은 얼마든지 변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나를 지키는 것, 슬퍼하는 내 친구들을 지키는 것은 다정한 마음과 돌봄, 그러니까 사랑뿐이라는 걸 알게 됐다.
국가가 지금 내 상태 혹은 내 성향과 반대로 흐르는 조류에 있다면, 국가가 나를 그 조류 안에서는 지켜주지 않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독립적으로 주체적으로 지켜야 한다. 우리가 집에서 독립하면 빨래하고 밥하고 청소하는 걸 혼자 해내야 하듯이 말이다. 우리는 국가의 국민이라서 여기서 만났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서 좋다. 나와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함께할 수 있으니 좋다. 지난 5년간의 국가의 조류와 다르게 흘렀던 사람들, 아마도 이번에 당선인을 선택한 사람들은 지난 5년간 이번 선거로 우울한 내 친구들처럼 느꼈을 거다. 5년간 미움과 슬픔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당선인이 국민을 위하고 국민이 키웠다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선인을 지지한 사람과 내가 굉장히 달라 보이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 닮았다. 그 본질에서 뻗어 나온 줄기와 잎사귀의 크기, 색깔, 모양만 다를 뿐이다. 다들 사랑받고,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 험하고 팍팍하게 느껴지는 현실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다. 생존 방법과 태도, 쓰고 있는 안경이 나와 다를 뿐이다. 그것을 오랜 돈과 시간, 단절과 눈물, 수없이 많은 글을 쓰면서 내 안경의 생김새를 더듬어 가면서 알게 됐다. 나와 반대처럼 보이는 사람과 나는 삶의 방식이 달랐기 때문에 삶의 세세한 부분에서 똑같이 느끼지 못하지만, 그 뿌리는 나처럼 무사히 살고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란 걸 알기에, 같은 뿌리를 가진 사람으로서 공감하고 공명한다. 나는 내가 아니기도 하지만, 나이기 때문에 반대를, 당선인을, 국힘을 지지하지 않는다. 동시에 나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도 사랑한다. 다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
친구들이 힘을 내면 좋겠다. 자신의 성향과 반대의 조류 속에 있으니 마찰도 저항도 많이 겪겠지만, 충분히 자신답게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사랑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혼자가 아니니 얼마나 좋냐고, 함께 더 많이 사랑하자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