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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팬 Jul 04. 2024

키스하는 부부는 아름답습니다.

맨발로 걸으니까 맨발의 청춘이 된 것 같네.

여보맨발 걷기로 말기 암이 나은 분도 있대.”     


아내가 유튜브를 보다 어느 팔십 대 노인이 맨발 걷기로 말기 암을 고쳤다는 기적 같은 영상에 꽂혔습니다.

      

당신도 해야 해.” 

    

그때부터 우리 부부의 맨발 걷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침 동네 뒷산에 맨발 걷기 좋은 한적한 숲길도 발견했습니다     


아침마다 열심히 걸었습니다유튜브에서 제공해주는 정보처럼 맨발 걷기가 물론 건강에도 좋은 것이겠지만날마다 호젓한 숲길을 아내와 단둘이 데이트하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  



얼마 전의 일입니다   

  

퇴원하고 집에 돌아온 후 우려하던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수술 후유증이 점점 심해지더니 약물 부작용까지 나타났습니다전날 밤은 최악의 밤이었습니다밤새도록 고통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날이 밝아오자 극심하던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았습니다오늘은 맨발 걷기를 하루 쉴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아내가 더 걱정할 것 같아 평소처럼 그냥 하기로 했습니다 

    

등산모에 나이키 운동화 신고 까만 선글라스까지 쓰고 밖으로 나오자 스스로 생각해도 전혀 암 환자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얼마든지 걸을 수 있어.”

     

아내에게 큰소리는 쳤지만 그건 순전히 마음뿐이었습니다숲길 입구로 접어들 때쯤 정신이 아득해지며 현기증까지 일어났습니다  

   

완만한 고갯길을 올라가면서도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씩 그 자리에 주저앉아 쉬어야 했습니다그때마다 걱정스럽게 뒤쫓아오는 아내의 눈길을 의식하며 다시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맨발 걷기를 시작하는 언덕 위엔 벤치 의자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다른 날 같으면 으레 그 자리에서 신을 벗고 바로 맨발 걷기를 시작했겠지만 그날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거기까지 올라온 것만으로도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아내의 무릎을 베고 벤치 위에 길게 뻗어버렸습니다


눈을 감으니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습니다먹은 것도 없는데 토할 것 같아 한참을 그렇게 누워있었습니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정신이 들었습니다눈을 뜨자 아내의 얼굴이 보였습니다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나도 아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습니다염색할 때가 되어 희끗희끗해진 귀밑머리가 아침 햇살에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그새 굵은 주름살이 얼굴에 더 많이 늘어났습니다

     

아내의 얼굴 위로 푸른 숲이 보였습니다빽빽이 하늘 위로 뻗어 올라간 나무들도 보였습니다 

    

숲을 보고 나무를 보자 아스라이 까마득한 옛일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

        


거기까지 가기는 좀 무리 아닐까?”   

  

아직은 괜찮아. 임산부도 많이 걸어야 아기가 잘 나온대.”   

 

아내와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숲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미 아내는 만삭의 몸이었습니다우리 첫 아이 출산 예정일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결혼 후에도 연애할 때와 똑같이 휴일만 되면 부부가 잘도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곤 했습니다. 그러나 임신한 아내의 배가 점점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오르자 어쩔 수 없이 아내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바람 쐬고 싶어너무 갑갑해.”  

   

그럼 어디 바람이나 쐬고 오자.”     


이렇게 해서 출산 전 마지막 데이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제법 쌀쌀한 날씨라 속옷을 잔뜩 껴입고 헐렁한 임신부 옷을 뒤집어쓰고연애 시절 종종 놀러다니던 서울 인근의 한적한 숲길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마음만 다람쥐 같았지 뒤뚱뒤뚱 불안정한 걸음걸이로 숲길을 오래 걸어 다니는 것은 무리였던 것 같습니다. 별로 많이 걷지도 않았는데 아내가 그만 지쳐버렸습니다 

    

퉁퉁 부어오른 아내의 얼굴을 보자 겁이 더럭 났습니다아이고만삭의 임신부를 이 먼곳까지 데리고 오다니 내가 정신이 나갔구나참 철없는 신랑이었습니다

     

서둘러 돌아가기로 했습니다그런데 보니까 아내는 더 철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조약돌 예쁘!” 

     

가던 길에 개울이 나오자 개울가에 쪼그리고 앉더니 찬물에 손을 넣고 조약돌을 줍고 있었습니다어른들이 보면 곧 아기 낳을 임산부가 뭐 하는 짓이냐고 기겁할 일입니다    

 

뭐 해물이 찬데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자기도 이리 와봐여기 예쁜 조약돌 많아.” 

    

조약돌 줍는 아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기 낳기 전에 마지막으로 여기서 키스하는 사진 한 장 찍어볼까?     


생각만 하는 게 아니고 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삼각대를 펼치고 카메라 셔터를 자동으로 맞춰놓았습니다 그리고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아내에게 다가갔습니다   


우리 여기서 키스 한 번 하자.”   

     

어머미쳤어누가 보면 어쩌려고.” 

    

아무도 없잖아이리 와!”   

  

아내를 와락 끌어안았습니다그리고 뜨겁게 입을 맞췄습니다


…………


…………

     

하나다섯.    

 

찰칵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큰아이 낳기 전우리 부부 둘만의 마지막 키스가 이렇게 오롯이 사진 한 장에 담겼습니다  


그 일 후 며칠 지나 갑자기 양수가 터지고 산통이 시작되면서 우리 첫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몇 달 전 암 수술받고 회복실을 거쳐 다시 병동으로 돌아왔을 때의 일입니다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극심한 통증이 뒤따랐습니다  

   

내가 입원한 암 병동은 보호자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 간호간병 통합병동이라 아내도 병실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꼼짝 못 하고 혼자 고통받으며 간호사의 도움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눈을 뜨니 우리 큰아이의 얼굴이 보였습니다언제 들어왔는지 큰아이가 내 곁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빠힘들지?”    

 

너 어떻게 여기 들어왔니?”   

  

큰아이가 씩 웃었습니다.

      

몰래 들어왔어아빠 보려고  

   

눈물이 핑 돌면서 나도 모르게 큰아이의 손을 잡았습니다  


"뭐하러 왔어. 바쁜데…"


그리고 속으로 가만히 속삭였습니다     


우리 큰아들. 자랑스런 내 아들. 아빠가 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훌륭하게 잘 자라주었구나  

   

큰아이 손을 잡고 있노라니 잊고 있던 아주 오래전의 감촉 하나가 아스라이 기억 속에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태동이었습니다. 키스하기 위해 아내를 품에 안는 순간, 신비로운 태동을 느꼈습니다. 

    

큰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발길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태아의 힘찬 발길질 소리가 고무풍선처럼 잔뜩 부풀어 오른 아내의 자궁 안에서부터 내 가슴 깊은 곳으로 쿵쿵 울려퍼지고 있었습니다

     

아빠아빠!”      


뱃속의 아기가 마구 발길질하며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 빨리 나가고 싶어나 빨리 엄마 뱃속에서 나가고 싶어.”   


       

***    


       

우리 맨발 걷기 해야지.”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벤치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괜찮겠어?”  

    

맨발 걷기 하면 말기 암도 낫는다니까 걸어야지.”  


"맞아. 힘들어도 걸어야 해. 빨리 나아야지. 암을 이겨내야지."


"두번째로 암에 걸리니까 첫번째 같지 않네. 많이 힘들어."


"그래도 당신은 또 이겨낼 거야. 당신 아직 할 일 많잖아. 은퇴했어도 당신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잖아. 나는 믿어. 당신의 전성기는 이제부터 시작될 거야." 



***



맨발로 나란히 손잡고 걸어가는 우리 부부의 머리 위로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내리고 있었습니다. 


"맨발로 걸으니까 맨발의 청춘이 된 것  같네."


"오. 그래? 청춘이 되었다면, 당연히 키스도 해야겠지?"


"…어머. 주책. 여기서 지금 뭐 하는 거야?"


"우리도 마음은 청춘이잖아. 옛날 키스의 추억을 만화로도 한 컷 남겨보고 싶어서…"


…………


…………


  


 키스하는 부부는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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