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저 여자가 나랑 같이 사는 육십 대 할머니 맞아?
“야! 옷 정말 예쁘다!”
“세상에. 너무 보기 좋네. 사모님. 너무 예뻐.”
“사모님. 그 옷 입으니까 딴 사람 보는 것 같아.”
주일예배에 참석한 노 사모님들이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날의 소동은 순전히 아내가 입고 간 원피스 때문이었습니다. 아내가 미국 살다 돌아온 육촌동생에게 옷 몇 벌을 선물 받았는데 그 옷들이 하나 같이 울긋불긋 꽃 대궐 패션이었습니다.
아내가 옷을 입었다 벗었다 망설이더니…
“아휴, 이 옷 도저히 못 입겠다. 너무 화려해. 이런 옷 입고 어떻게 예배드리러 가?”
“뭐 어때? 우린 이제 목회 은퇴했는데…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잖아. 그냥 입고 가.”
목회에서 은퇴한 후 우리는 목사님 사모님들만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모두 다 은퇴하신 70대 80대 노 목사님 사모님들이시고 일반 성도들은 한 분도 없습니다.
목회하는 긴 세월 동안 아내는 밝은 색상의 옷을 입고 교회 간 적이 거의 없습니다. 혹시라도 힘든 형편의 교인들에게 상처가 될까 싶어 늘 어두운 색상의 옷만 골라 입고 다녔습니다.
아내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함께 예배드리는 모든 사모님들이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사모님들에게 아내가 용기를 내어 과감히 입고 간 울긋불긋 꽃 대궐 패션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 옷 어디서 샀어? 나도 죽기 전에 이렇게 예쁜 옷 한번 입어보고 싶다. 목회하느라고 평생 예쁜 옷 한 번 입어본 적 없어.”
“나도 그래. 목회한다고 맨날 검정 치마 검정 바지만 입고 다녔어. 그 옷 얼마짜리야?”
“아유. 사모님. 이 옷 디자인만 요란하지 싸구려예요. 내 육촌동생이 미국 살 때 입던 옷인데 지금은 살쪄서 못 입는다고, 저 맞으면 입으라고 준 거예요.”
“그래도 사모님. 그 옷 입으니까 너무 잘 어울린다. 남자들이 홀딱 반하겠어.”
아내와 노 사모님들이 깔깔대고 대화하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까맣게 잊고 있던 오래전의 기억 하나가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펄떡펄떡 기억의 수면 위로 뛰어올라 왔습니다.
아내와 이탈리아 남부의 아름다운 휴양지인 카프리섬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만 해도 아내가 육십 대 초반이었으니 아직 한참 젊은(?) 시절이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연애도(?) 할 수 있는 나이였습니다.
“저것들은 역마살이 끼었나? 짤짤거리고 잘도 싸돌아다닌다.”
신혼 시절 함께 살던 외할머니께 자주 듣던 꾸중입니다.
외할머니 말씀처럼 우리 부부는 정말 잘도 싸돌아다녔습니다. 틈만 나면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싸돌아다녔고 훗날엔 전 세계 수많은 나라 수많은 도시 수많은 명소들을 싸돌아다녔습니다.
돌아보면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나는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날마다 꿈을 꾸었습니다. 나는 커서 꼭 세계 일주를 할 거야. 이 모든 나라들을 다 가볼 거야.
전쟁의 포연이 갓 그친 1950년대에 태어나 찢어지게 가난한 60년대 70년대를 살아가던 소년에게 그 꿈은 말 그대로 꿈이었습니다. 당시로선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꿈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꿈꾸는 것을 하나하나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가보고 싶은 모든 나라 모든 도시들을 그림으로 빼곡하게 그려놓고 벽에 붙였습니다.
날마다 벽에 붙여놓은 그림들을 바라보며 꿈을 꾸었습니다. 나는 꼭 저 나라에 갈 거야. 나는 꼭 저 나라에도 가볼 거야. 나는 내가 그림으로 그려놓은 이 모든 나라들을 다 여행할 거야.
하나님은 그 꿈을 이루어주시려고 먼저 한 소녀를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소년이 사춘기 시절 만난 소녀는 그야말로 꿈 같은 소년의 꿈을 믿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함께 꿈을 꾸었습니다. 우리 이 나라에도 꼭 가보자. 저 아름다운 섬에도 꼭 가보자.
그 소녀는 훗날 소년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꿈많은 소년과 소녀였던 우리 부부가 꿈꾸던 그 많고 많은 나라 중에 이탈리아가 있었고, 그 많고 많은 섬들 중에 카프리섬이 있었습니다.
카프리섬은 여행자를 마법에 빠지게 하는 섬이다! 어느 여행잡지에서 읽었던 광고 문구입니다.
그때부터 카프리섬에 대한 로망이 생겼습니다. 많고 많은 섬들 중에서도 반드시 가봐야 할 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이탈리아에 갈 때마다 길이 잘 열리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나폴리까지 찾아가서도 일정상 카프리섬을 코앞에 두고 그냥 아쉽게 돌아와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은 육십을 훌쩍 넘겨서야 처음 카프리섬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나폴리에서 기차 타고 소렌토로 가서 카프리섬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카프리섬은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관광지고 휴양지입니다. 당연히 호시탐탐 내 주머니 속의 지갑을 노리는 소매치기들을 최우선으로 경계하고 주의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곧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카프리섬엔 소매치기들이 없었습니다.
그럴 리가? 악명 높은 이탈리아의 소매치기들이 어찌 이 물 좋은 황금어장을 외면할 수 있다는 말이냐? 그러나 그건 사실이었고 그 까닭이 재미있었습니다. 마피아 때문이었습니다.
카프리섬은 마피아가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마피아라는 더 거대한 악이 소매치기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악을 국가공권력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마피아 덕분에 카프리섬은 여행자들이 소매치기 걱정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매우 안전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마피아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부담 없이 유람선에 올랐습니다.
과연 명성답게 카프리섬의 풍광은 수려했습니다. 정신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대다가 지쳤습니다. 그제야 문득 뭔가 옆이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 아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내 옆자리를 지키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 사람이 어디 갔을까? 두리번거리며 아내를 찾았습니다. 그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참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아내를 찾고 있는데…
배 후미에 언뜻 아내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웬 낯선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남자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것입니다. 젊고 잘생긴 이탈리아 남자들이 아내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손짓 발짓해가며 뭔가를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었습니다.
한눈에 봐도 작업(?) 거는 모습이었습니다. 수컷(?) 여러 마리가 암컷(?) 한 마리에게 열렬히 구애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어쭈? 저놈들 봐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니. 저 녀석들이 도대체 할머니(?)에게 뭐 하고 있는 거야. 저놈들 눈엔 아내가 몇 살로 보이는 걸까? 서양 남자들은 동양 여자 나이를 잘 분간하지 못한다더니 사실인 모양입니다.
쭉쭉 빵빵 잘생긴 금발의 외국 남자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아내를 보니 무척 낯설었습니다. 평생 보지 못하던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이제까진 그저 내 아내고 한 교회의 사모님이고 두 아들의 엄마요 초등학교 다니는 손자가 있는 평범한 할머니로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아. 갑자기 여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노을빛에 붉게 물든 얼굴과 목에 두른 분홍색 스카프가 바닷바람에 펄럭이는 모습이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아니. 저 여자가 나랑 같이 사는 육십 대 할머니 맞아?
아하. 그렇구나. 여기가 바로 카프리섬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여자라도 아름답게 보인다는 카프리섬의 마법에 저놈(?)들도 나도 제대로 걸려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확실하게 깨달아지는 진리가 있었습니다. 할머니도 어쨌든 여자는 분명 여자다!
여자(?)로 변신한 할머니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다 저 쳐죽일 바람둥이 도적놈들 이탈리아 늑대들 사이를 유유히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이놈들아 껄떡대지 마.
너희들 눈깔(?)에는 몇 살로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 여자는 너희들 엄마뻘이고 최소한 고모나 이모뻘이 된단다. 이 후레자식 놈들아. 도대체 할머니에게 작업(?) 거는 놈들이 어디 있니?
뚜벅뚜벅 아내에게 다가가 선상 카페에서 갓 뽑아온 에스프레소 한 잔을 최대한 멋진(?) 폼으로 아내에게 건넸습니다. 갑자기 키 큰 오리엔트남자(?)가 나타나자 늑대들이 조용해졌습니다.
아내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봤지? 내 남편이야.”
그리고 내 팔짱을 와락 끼더니 당당한 걸음으로 이탈리아 늑대들 사이를 빠져나왔습니다.
한 녀석이 우리 부부를 지켜보다 엄지손가락을 척 추켜올렸습니다. 멋지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당연히 멋져야지. 나도 물론 멋지겠지만(?) 내 옆에 할머니는 더 멋지지. 이 세상에 육십 대 나이에 쭉쭉 빵빵 이탈리아 바람둥이들의 구애를 받는 할머니가 어디 그리 흔하랴?
“야! 옷 정말 예쁘다!”
“세상에. 너무 보기 좋네. 사모님. 너무 예뻐.”
“사모님. 그 옷 입으니까 딴 사람 보는 것 같아.”
“그 옷 어디서 샀어? 나도 죽기 전에 이렇게 예쁜 옷 한번 입어보고 싶다. 목회하느라고 평생 예쁜 옷 한 번 입어본 적 없어.”
“나도 그래. 목회한다고 맨날 검정 치마 검정 바지만 입고 다녔어. 그 옷 얼마짜리야?”
“아유. 사모님. 이 옷 디자인만 요란하지 싸구려예요. 내 육촌동생이 미국 살 때 입던 옷인데 지금은 살쪄서 못 입는다고, 저 맞으면 입으라고 준 거예요.”
“그래도 사모님. 그 옷 입으니까 너무 잘 어울린다. 남자들이 홀딱 반하겠어.”
아내가 입고 온 울긋불긋 꽃 대궐 패션 옷이 예쁘다고 아우성치는 사모님들을 애써 외면한 채 멀찌감치 떨어져 지긋이 눈감고 계신 노 목사님들께 조용히 한 말씀 올리고 싶었습니다.
목사님들. 평생 사모님들께 검정 치마 검정 바지만 입고 살게 하신 것 회개하세요.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사모님들 모시고 카프리섬에 다녀오세요.
카프리섬에 가시면 평생 검정 치마 검정 바지 입고 사신 사모님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단 그 후레자식 이탈리아 카사노바 바람둥이 놈들만은 조심하셔야 하고요.
카프리섬을 물들인 노을빛은 아내 얼굴의 잔주름도, 검은 머리 사이로 마구마구 솟구쳐오르는 흰 머리카락도, 주홍색 물감으로 곱게 덧칠해주고 신부의 얼굴처럼 예쁘게 단장해주었습니다.
그날, 카프리섬의 마법에 빠진 아내는 아내는 마치 네버랜드에서 회춘한듯(?) 아름다워보였습니다.
아.
기어코 나마저 카프리섬의 마법에 빠지고야 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