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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Sep 03. 2024

백발 산모


41세에 첫 아이를 낳았다. 우리 부부 둘 다 늦은 나이에 결혼했기에 아기를 가져야겠다는 생각, 그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들은 젊은 부부들의  자유로운 소망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아무리 의학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우리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렇게 생각하는 게  여러모로 마음이 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연임신이 되어 아가를 품에 안 되었다.


어떤 분야든 10년이 늦은 나는 어디를 가나 '왕언니'에 속했다. 직장에서도 여러 모임에서도  대체로 그랬다. 게다가  임신까지 늦었으니 산부인과에서도 '고위험군 산모'로 분류되어 대형 산부인과 전문병원을 다녀야 했다. 배가 남산같이 불러서 병원에 가면 나보다 어리고 어여쁜 아가씨처럼 보이는 임산부들만 눈에 띄었다. 요즘 임산부들은 대체로  기존의 몸매를 유지하되 배  나온 체형이서 왠지 신기하고 낯설었다.


'아니, 왜 이렇게 날씬한 거야? 인간미 없다! 인간미 없어!'


'어휴, 내가  천 년을 산다고...  결혼을 하고... 이렇게 임신을 해서... 휴, 힘들다, 힘들어.'


다른 임산부들을 만나면 그들의 젊음 앞에 늘 기가 눌려 뱃속 아가에게 미안한 마음도 배가 되었다.


'미안하다... 아가야. 엄마가 이렇게 나이가  많아서. 너도 젊은 엄마를 만났으면 더 좋았겠지. 휴...'


담당 의사는 "하루에 30분 정도는 산책 겸 걷기 운동을 하셔야 합니다. 집에만 계시지 말고요."라고 조언해 주었만 난 그 당시 매장에서 하루에 12시간씩 서서 일하고 있었다. 누가 시켜서 벌인 일도 아니고 내가 원해서 한 창업이기에  몸이 들어도 누구를 원망할 사람도 없었다.  진료 때마다 의사가 걱정해서  한 말이어서  그저 '알겠어요.'라고만 대답했다.


"아이를  낳려면 차라리  일찍 낳아 길러라.'



라는 어른들의 조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아무 남자나 납치해서 결혼할 수도 없고 마음에 맞는 상대를 만나는데 40년이나 걸렸는데... 그리고  필라테스나 요가 같은  운동을 하는 여자도 아니라 근력이 이렇게 떨어지는데 과연 아기를 잘 낳을 수 있을까 하는 염려도  생겼다.


결국 피하고 싶었던 수술로 첫 아이를 출산했다.


만감이 교차하며 들어간 산후조리원에서 남편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 나이도 엄청 은데 고생했어. 수술해서 회복도 느릴 거야. 3주 정도 산후조리원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렇게 산후조리원에서 몸조리를 하기로 했다.


결혼도 출산도 남보다 늦었던 난 산후조리원에서도 '왕언니'가 될 생각을 하니  난감했다.  20, 30대 산모들이 다수인 이곳에서  왕따 아닌 왕따가 되어야 하나,라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솔직히 세대가 달라지니 대화도 안 통하는 것 같아 조용히 투명인간처럼 침묵하며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산모와 아기를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도 있었다. 몇몇 프로그램에 참석해 다른 엄마들 대화를 들어보니 역시 젊은 사람들은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빨라서 양육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들을 열심히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 얘들아~! 육아를 이론으로만 하는 게 아니란다. 모든 건 현장 경험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정보 교환만 한다고 아기가 잘 자라는 게 아니라고. 쯧쯧쯧... 요새 젊은 애들은 정보 공유 너무 좋아해... 쯧쯧...'


하면서 속으로  '꼰대 왕언니' 노릇을 하고 있었다.


몸의 회복 속도가 더뎌서 그런지 모든 게 힘들었다. 심지어 밥알을 씹는 것도 어려워 식사도 대충 먹고, 수유하고 누워 잠만 자다  눈 뜨면 매장 상황이 궁금해 매니저에게 전화해서  현재 가게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산후조리원 동기 모임도 있어 가끔 만나 친목도 다지고 육아 정보도 공유한다고 하는데 일에만 매달려 치열하게 살던  젊은 산모들과 공통분모가 없다 보니 자의혼자가 되어  고독을 씹다 보니 조리원 생활이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아, 결혼을 일찍 할 것을...'


라는 의미 없는 후회를 하기도 하고


'아가를 앞으로 어떻게 키워야 하나.'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 날은 잠도 오지 않았다.  남편은 현재 상황에 몸을 맡기고 아직 어지지도 않은 먼

미래에 대한 생각은 일단 접어두라고 했지만 불안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신생아실에서 수유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신생아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그렇게 고민 많던 나의 뇌가 정지하는 어떤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백발의 할머니 한 분이  고개를 숙이고 아기에게 모유 수유를 하고 있었다...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 소파에 앉아  아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순간에 그분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생각보다 어 보였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였다. 야심한 밤... 그녀와 나... 어쩔 수 없이 눈인사를 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아기가 배가 고픈 모양이네요?"


그분은  먼저 나에게 인사를 건네었고 난 그저  양손을 모으 공손히 "네, 네" 하며 답할 뿐이었다.


젊은 산모들이 가득했던 조리원에서  늦은  밤! 갑자기 나타나신 백발의 산모 앞에서 난 그저 르게 앉아  겸손한 마음으로  성실히 수유할 뿐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분의 나이는 45세고  귀농해서  버섯 농사일을 하다 보니  바빠서 피부를 가꿀 시간도, 머리 염색할 시간도 없었다고 했다. 


" 임신 중에 염색은 안 좋잖아요. 제가 흰머리가 많아 이상해 보이죠?"


"아니에요.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아요. 얼굴도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세요.  저도 노산이지만  산모님도 참 대단하세요! 저는 여기서 제가 왕언니인 줄 알았는데 오늘로써  언니 자리를 겼네요. 호호호.."


"가 좋아해야 되나요? 호호호.."


적어도 그날, 그 백발의 산모는 왠지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제는  어디 가서  왕언니  꼰대 노릇도 못하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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