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2) 양계초의 계몽예술사상
국가의 구망도존(求亡圖存)이라는 위기에 직면한 사상가로서 양계초는 '변법통의(變法通義)'에서, “변해도 또 변해야 하고, 변하지 않아도 또 변해야 한다.” 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 과거의 전통적 문화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버리고 서구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중국문화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문화라는 것은 본래 한민족이나 국민의 정신적 자유의 소산이며, 곧 그들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다. 그 핵심은 바로 문화를 만들어가는 중국인들의 ‘자유’에 있었다.
(김현주, 중국현대 문화개념의 탄생 -양계초의 문화관을 중심으로-, 2019, 초록 발췌)
양계초는 11세에 과거에 합격한 수재였다. 어려서부터 영민했던 그는 위기상황에 처한 나라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고, 점점 힘들어지는 백성들의 삶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양계초는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실 정치에 깊이 개입하게 되면서, 현상금을 목에 걸기도 하고 망명생활을 하기도 하며 화려한 정치경력을 가지게 되었다.
양계초는 학술 방면에서도 정치경력 못지않은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역사연구법], [중국문화사] 등 방대한 양의 글을 남겼으며 그 연구범위는 동서고금의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했다고 한다. 그는 젊을 때는 서양의 학술을 소개하는 데에 주력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이후 서구사상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되었고, 슈펭글러(spengler)의 [서구의 몰락]에서 중국 사상의 희망을 발견하면서 만년에는 중국 사상 연구에만 몰두했다.
양계초는 시, 소설, 음악의 효과에 대해 큰 기대를 가졌다. 사람을 움직일 목적으로 쓰여진 소설은 사람을 지배하기도 하고, 잘 쓰여진 음악은 때로는 한 감상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 ‘정감’이라고 칭하는데, 그는 인간과 사회의 계몽을 위해 정감을 극도로 강조했다.
정감 : 사람을 초현실적인 경계로 이끄는 힘
양계초, [중국의 운문에 표현된 정감], 1920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최원배도 그랬다.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이들은 특별히 인간의 ‘정감’을 중시하고 정감의 교육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이런 경향은 조금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의 중국 사상에서 ‘정情’이란 ’성性(성품)‘과 짝을 지어 이야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학자들에 의해 ’정‘ 자체만으로도 가치를 인정받고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근대의 학자들은 맹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여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미학의 역사]에서는 이에 대해 세 가지 원인을 제시한다.
당시 서구에서 유행하였던 신낭만주의가 중국에 문화예술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
‘생의 약동‘을 이야기한 철학자 베르그송의 사상이 당시 중국에도 유행했다는 점
당시의 사회, 정치적 개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추진력 있는 수단이 요구되었을 것이라는 점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사회의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했던 이 시기는 대중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자극적이고 흡인력인 무언가가 필요했다. 때문에 국민들의 참여를 이끌기 위해 비교적 손쉬운 방법인 정감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적인 방식에 우선하여 정감을 중시한 것은, 목표 달성에만 급급하여 졸렬한 수단을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학의 역사] 중
하나의 훌륭한 작품이 주는 감동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극히 예외적인 경우일 뿐인데 이런 가능성을 근거로 한 주장이라면 비상식적인 것을 일반화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그토록 영민한 양계초인데, 왜 그는 이런 접근방식을 사용했을까? 사실 그는 정감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 깊이 있는 주장을 하지는 않았다. 단지 예기의 [악기]에 나타난 중국 전통의 어떤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예악으로 심성을 다스려 인격을 도야한다는 것이 [악기]의 주장이고, 인격을 도야할 수 있다는 것은 양계초가 주장하는 ‘국민성의 개조’라는 계몽의 취지에 부합했던 것이다. 또한 [악기]에서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선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사람을 선량하게 만들기까지 한다니. 양계초의 입장에서 음악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최상의 도구였다.
하지만 교육의 수단이 교육의 목표를 바로 실현할 수는 없다. 양계초는 교육의 수단과 목표 사이의 거리를 고려하지 않았다. 심지어 [악기]의 주장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양계초는 음악이 인간고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는 한 방향에서만 생각했지만, [악기]에서는 정치가 음악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도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좁은 시야였음에는 틀림없다.
세상이 잘 다스려질 때의 음악이 안온하고 즐거운 것은 정치가 조화롭게 행해지기 때문이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의 음악에 원망과 분노가 담겨 있는 것은 정치가 잘못되고 있기 때문이다. - 예기 [악기]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점이 있다. 양계초와 최원배가 살았던 1800년대는 지금처럼 정보나 어떤 매체를 접하는 게 당연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정보를 선동하면 그걸 접하는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믿게 되는 그런 현상이 있던 시절 말이다. 인쇄매체도 없고, 음악 연주를 감상한다는 것 자체가 귀중한 기회였을 것이다. 반면 현대사회는 매체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 현대의 예술은 더할 나위 없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의 역할이 그만큼 축소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로 본다면 당시의 매체 영향력은 지금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어쨌든 지금의 시선에서 무리하게 느껴지는 주장도 그 시대에는 상당히 호소력을 가졌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