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1)-첫 밀레니엄의 기독교회
제목에 ‘기독교회’라는 타이틀을 강조할 수 있는 시기. 바로 중세이다. <미학 겉핥기>에서 미학의 역사를 훑어보며 중세는 교회의 힘이 너무 강하다는 인식이 생겼다. 미학이 연구될 틈도 없었을 정도로 말이다. ‘암흑시기’라고 칭해질 만큼 교회에 집중되어 있었던 시기였는데, 예외로 음악만큼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의 힘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나는 청소년기를 독실한 기독교(개신교) 신자로 보냈었다. (지금은 아니다.) 그때를 되돌아보니 교회에서 음악이 중요하게 생각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첫 번째로 음악은 감정을 동요시킨다. 우리가 TV에서 가수들의 노래를 듣고 종종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말이다. 교회를 잘 모르는 이들도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을 텐데, 그 배경에는 더 벅찬 느낌이 생기도록 유도하는 음악의 역할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음악은 암기를 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학교에서 배우는 시 한 편은 그렇게 외우기 어려운데, 아이돌 가수들의 가사는 금방 외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아기들도 노래하면서 알파벳을 익히는 것처럼 음악을 사용하면 암기가 용이해진다.
신학자들은 이런 효과가 있는 음악을 교회를 믿도록 유도하는 도구로, 당시 교육받을 곳 없던 일반 사람들을 가르치는 용도로 사용했다. 음악을 이렇게 유용하게 사용했으니 더 큰 효과를 위해 많은 연구가 병행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 시기의 음악 발전이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는 그 속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서양의 교회가 처음 전파되었던 시기부터 추적해 볼 것이다. 참고로 이 시기에 말하는 교회는 지금 말하는 개신교 교회가 아니라, 현재 성당이라고 불리는 가톨릭 교회이다.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다. 이건 천주교도 개신교도 똑같다. 예수를 믿어야 하는 스토리는 대강 이렇다.
하나님이 이 땅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를 보내주셨고, 예수가 우리 대신 죄를 짊어지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
하나님은 예수를 ‘인간’으로 보냈다. 이 말은 어떤 나라의 국민이었다는 뜻인데, 예수는 바로 로마 제국의 국민이었다.
당시 로마제국은 로마의 신들과 황제를 믿고 있으면 어떤 종교활동을 하던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만 믿어야 하는, 단일신을 위한 종교였기 때문에 로마황제 입장에서 기독교는 이단(사이비)였고 기독교는 박해받기 시작했다.
그들의 박해는 무려 250년 정도를 기독교 뿌리 뽑기에 힘을 쏟았을 만큼 심했고, 기독교의 출발은 교회의 힘이 엄청 강하다는 중세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매우 힘겨웠다. 하지만 이렇게 박해받던 기독교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계기가 있다. 바로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밀라노 칙령’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유를 가지고, 안전을 가지며, 우리의 공화국의 안녕을 위해, 우리의 연방이 모든 부분에서 손상되지 않고, 그들이 그들의 집에서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 그들의 신에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
“… 어떤 위협이나 사기 등을 통해 지불이나 대가 없이 몰수한 기독교인들의 재산은 모두 돌려줄 것이요”
쉽게 말하자면 우리 로마는 모두의 평화를 위해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게. 너희들 종교활동 마음대로 해! 뺏은 것도 다시 돌려줄게!라고 말한 것이다. 기독교는 약 80년 뒤인 392년에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받게 되었고, 무려 로마황제의 비호를 받는 입장이 되어 엄청난 신분상승효과를 얻게 되었다.
이제 인정도 받았겠다, 기독교인들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예배의 틀이나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 나타날 수는 없었다. 새로움의 시작은 언제나 모방이기에 기독교의 일부 요소는 유대교에서 가져오게 되었다. 주로 성서를 영창 하는 것, 시편(찬양 시)을 노래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종교의식을 거행할 동안 상황에 알맞은 시편을 골라서 노래하고 악기로 반주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교회에서 부르는 노래를 ‘성가’라고 칭하게 되었다. 하지만 교회 지도자들은 음악을 야무지게 활용하는 도중에도 음악 자체에 빠지는 것은 경계했다. 음악에 너무 빠지면 찬양을 위한 음악이 아니라 단순한 오락을 위한 음악이 되기 때문이다. 당시의 음악은 종교의 하인일 뿐이었고, 기독교에서 가르치고 싶은 것만 교회에서 들려야 했다. 가사가 있는 성악음악은 성경을 담을 수 있어서 인정되었지만, 기악음악은 가사를 담을 수 없기 때문에 비난받고 배척당했다.
395년,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갈라졌다. 그 이후로 교회들도 분열이 되기 시작했는데, 로마처럼 두 갈래로 분열된 것은 아니었다. 교회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방식을 정해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로 따지면 각 지역에 사투리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을 계기로 매우 다양한 성가들이 탄생하게 되었고 미래의 다채로운 음악의 탄생하는 데에 큰 영향을 준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