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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도르노 Jul 04. 2023

그때 그 시절 성가를 소개합니다!

중세(2) - 교회의 분열과 성가의 지역화

콜로세움은 로마 분열 전 건설되었다.

음악사를 이해하려면 어쩔수없이 교회의 역사와 친해져야 한다. 일단 ‘성가’란 무엇일까? 교회에서 쓰는 음악인건 알겠는데, 어떤 특징이 있는 음악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중세의 성가는 기본적으로 멜로디가 딱 하나 있는 단성음악이었다. 보통 시편같은 것을 선율에 맞춰 불렀는데, 단선율이다보니 간단해서 기록이 필요 없었다. 이렇게 쉬운 멜로디에서 시작된 음악이 다양하게 발전해서 지금의 음악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오늘 다루는 음악들은 시대가 시대인 만큼 대부분 남자만 부를 수 있었고, 악기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로마의 분열


테오도시우스 1세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죽으면서 자신의 두 아들에게 제국을 양분하여 물려주었다.

로마제국은 235년부터 위태위태하다가 결국 395년에 두 개로 갈라졌는데, 서로마제국은 얼마 못가 붕괴되고(476) 반대로 동로마제국은 굉장히 오래 지속되었다(1453). 서로마의 황제는 허울뿐인 존재로 전락했고 동로마는 콘스탄티누스가 집권하여 비잔틴 제국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분열된 로마와 주요도시를 현대 지도에 표시했다.
서로마의 수도는 밀라노와 라벤나였고 로마역시 큰 힘을 가진 도시였다. 동로마(비잔틴제국)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노폴리스)로 현재의 이스탄불이다.

나라가 분열되고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도 변했다. 원래 초기 기독교 사도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했었는데, 분열 이후 동방 교회에서는 그리스어 사용을 지속했지만 로마와 서방교회는 라틴어(로마제국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차이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결국 로마교회는 1054년에 영구적으로 분열되어 서방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동방교회는 비잔틴교회가 되었다. 여기서 로마 가톨릭교회가 지금의 천주교(성당), 비잔틴교회가 지금의 동방 정교회의 전신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칼체도니아의 임마누엘 동방 정교회 대주교를 맞이하며 인사하고 있다. ㅣ 출처: VATICAN NEWS

분열된 교회들은 처음엔 기독교 교회들에서 진행되었던 일반적인 형식을 따라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각자의 분파가 생기면서 자신들의 의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몇몇 교회들의 성가를 살펴보자.


비잔틴 성가

비잔틴 성가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예술이기도 하다. ㅣ 출처: 유네스코

동로마제국의 비잔틴교회의 예배는 성서(성경책)나 시편을 운율에 맞춰 노래했다. 비잔틴 성가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찬미가’인데, 가사를 운율에 맞춰 노래하는 것에서 더 발전해서 발달된 선율로 노래를 부른다. 처음엔 그리스어 가사였지만 비잔틴 선교사들이 다른 지역에 종교의식을 전파하면서 다양한 지역언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찬미가 선율은 10세기부터 책에 기보되어 기록을 통해 계속 이어질 수 있었고 현재의 동방 정교회의 예배 의식에서 불리고 있다. 비잔틴 성가 선율에서 가장 인상깊은 창작기법은 ‘조각잇기기법’이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새로운 선율을 만들기 위해서 기존의 선율 조각들을 이어붙여 결합하는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암브로시오 성가

성 암브로시우스

서방교회에서 로마 다음의 중심지는 밀라노였는데, 서로마황제의 주요 거주지였을 만큼 번성한 도시였다. 밀라노 예배에 사용된 노래는 밀라노 주교였던 성 암브로시우스 이후에 암브로시오 성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밀라노의 번성도 잠시, 8세기부터 로마는 자신들의 권위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세속적 통치자들과 동맹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서방교회의 전례와 음악이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대부분의 지역 성가들은 로마에 흡수되거나 사라지게 되었는데, 암브로시오 성가도 피할수는 없었다. 억압의 영향으로 어떤 음악이 그 시대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성가 자체는 오늘날까지 밀라노에 남아있다고 한다.


그레고리오 성가

그레고리오 성가 악보는 ‘네우마’라는 독특한 기보법을 사용한다.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성가를 하나 선택해야한다면 그 어떤 누구라도 그레고리오 성가를 선택할 것이다.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되는 그레고리오성가는 로마의 통치자들에 의해 전례와 음악의 규범화되던 그 시기에 생겨난 레퍼토리이다. 로마의 선율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프랑크인(현재 영국)에 의해 추가되고 변형되면서 생겨났다.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이름을 붙여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부르는데, 그레고리우스 2세가 통치했던 8세기 초 스콜라 칸토룸에 의해 체계화 되었기 때문이다.

스콜라 칸토룸(Schola Cantorum): 교황이 의식을 집행할 때 노래했던 합창단. ‘가수들의 학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7세기 후반에 창설되었고, 8세기 초반에 성가 선율을 표준화하는 역할을 했다.

<로마와 프랑크의 유대>
그레고리오 성가가 프랑크왕국에 영향을 받은 이유가 있다. 752년~754년 사이에 당시 교황이었던 스테파노 2세가 스콜라 칸토룸을 포함한 수행원을 데리고 프랑크 왕국에 체류했고, 프랑크 왕(페팽)은 교황의 지지를 얻어 단신 왕이 되었다. 프랑크 왕은 자신의 점령지에서 로마식 전례와 성가를 행할 것을 명령했고, 통일된 전례와 음악의 강요는 정치적인 기능으로 패펭에게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성가 선율을 표준화하는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페팽의 아들인 샤를마뉴 대제 역시 성가를 가르치지 위해 로마의 가수들을 북부로 보내면서 페팽의 정책을 유지했다. 당시 교황 레오 3세가 800년 부활절 로마에서 샤를마뉴 대제를 황제의 지위에 앉혔고, 이때부터 로마는 ‘신성로마제국’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그레고리오 성가에는 웃긴 썰이 있다. 성가가 체계화 된 시기는 분명히 그레고리우스 2세의 통치 시기인데, 전례서들은 이 성가가 그레고리우스 1세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도 그레고리오 성가를 그레고리우스 1세가 직접 작곡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당시 영국인들이 사람을 착각해서 기록한 것 같은데, 그들은 그레고리우스 1세를 그들 교회의 창시자로 숭배했다. 어느정도였냐면 비둘기 형상을 한 성령이 그레고리우스에게 성가를 불러주고 그레고리우스 1세가 그 성가를 다시 받아쓰게 했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이다.

비둘기가 그레고리우스 1세에게 성가를 불러주고, 그레고리우스 1세는 불러주는 성가를 적고있다.

교황에 대한 이런 찬사와 전설은 그 성가를 오래되고, 신빙성있고, 신성하게 영감을 받은 신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했고 통합된 교회의 공통적인 음악으로 채택될 수 있도록 촉진시켰다.


구로마 성가

그레고리오 성가가 주요하게 사용되던 때, 또 다른 주요한 성가가 한동안 로마에 존재했었다. 11세기와 12세기에 기록된 필사본에 보존되어 있는데, 이 음악을 구로마 성가(Old Roman chant)라고 부른다. 그레고리오 성가와 같은 가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선율은 좀 더 장식적이다. 이는 두 종류의 성가 모두 공통적인 근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오늘의 간단하게 4개의 성가를 알아보았는데, 성가들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해도 기억해야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성가=찬트(chant)라는 것! 사실 ‘그레고리오 성가’라는 단어보다 ‘그레고리오 찬트’라는 말이 더 익숙할정도로 찬트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 것 같다. 음악사를 좀 안다 하는 사람이면 성가 말고 ‘찬트’라는 단어 써보기! 오늘의 꿀팁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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