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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진 Apr 14. 2022

Advice for Future Corpses

샐리 티스데일-"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를 읽고, 외할머니를 생각하며

- 2021년 12월 12일, 당산에서 책 수집광이 쓴 글

미국에서의 짤막한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격동의 고등학교 2학년을 보내고 있던 나는 외할머니가 오랜 지병으로 힘들어하셨던 걸 누구보다 가까이서 봤다. 꽤나 긴 기간동안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할머니가 또다시 입원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가을날, 할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이번 제사는 꼭 본인 손으로 지내야 하겠다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퇴원을 했다. 외할아버지의 제사 다다음날 외할머니는 자신을 가장 열렬히 사랑했던 둘째 딸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이제야 모두에게 털어놓는 얘기지만, 그날 아침 나는 할머니한테 학교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아침마다 할머니 방문을 열고 “할매~~ 내 갔다오께~~” 라고 말하면, “그래 공부 열심히하고온나~~” 하며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었는데, 그날은 늦잠을 잔 탓에 통학버스를 놓칠 것 같아서 머리도 감지 못한 상태로 학교를 가면서, 그날은, 그날은, 그날은, 하필 인사를 하지 않았다.


교실에 주황색 햇살이 내리던 오후 네시쯤, 교감선생님이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찾았다. 교감선생님의 뒤를 따라 교무실로 가는 순간부터 나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아무 설명도 듣지 않았는데, 교감선생님의 조심스러운 말투와 함께 집에 있는 엄마와 할머니가 생각이 나서 울었다.


외삼촌과 통화를 하고 다시 교실로 돌아와서 가방을 싸고,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눈물이 흘렀다. 할머니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나 빨리 할머니와의 이별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날 아침 할머니한테 인사를 못했다는 게 생각났다. 왜 하필 오늘일까. 왜 나는 오늘 아침 할머니한테 금방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안 했을까. 왜 나는 오늘 늦잠을 자서 할머니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을까. 할머니한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는 인사를 하지 않았을까.


장례식 기간 내내 엄마는 정말 많이 울었다. 항상 강한 모습을 보여줬던 엄마가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슬펐다. 19살 어린 내게는 할머니의 죽음도 감당하기 힘든 큰일이었지만, 동시에 엄마가 저렇게 많이 울다가 정말 다 녹아서 사라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많이 하기도 했다. 많이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면서 더 속이 상해서 나도 울었다. 엄마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지않고 빨리 떠나버린 할머니가 그리우면서도 미웠다. 나의 할머니가 사라졌다는 사실도, 엄마의 엄마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힘들었다. 나의 엄마도 언젠가는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그래서 나도 아주 많이 울었다.


입관식 날 너무나도 평온해 보이는 할머니의 얼굴을 만지면서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몇 번을 말했다. 이미 많이 늦어버린 마지막 인사였지만. 하늘나라에 가서는 아프지 말라고, 엄마가 너무 마음 아파하지 않게 지켜달라고, 고집 세고 못된 손녀여서 미안하다고, 할머니가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손녀딸이 되겠다고 이야기했다.


이 책을 읽었던 때에 유난히 외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고, 애도의 시간을 갖고, 그로 인해서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처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할머니의 마지막 일년 동안 할머니가 가장 많이 하던 말은 "얼른 죽어야할낀데, 느그 엄마 고생 안하게 빨리 가삐야 할낀데" 였다. 할머니의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냐며 할머니한테 핀잔을 주곤 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할머니의 그 말이 진심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본인의 삶도 소중하지만, 본인의 삶만큼이나 사랑했던, 아니 그 이상 사랑했을 딸의 고생이 더 싫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할머니가 원했던 삶과의 이별 방식은 할머니가 겪었던 그 방법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외할머니는 누구보다도 힘든 삶을 살았다. 그 시대 누구든 간에 힘들게 살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있겠냐마는. 그리고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따뜻한 사람이었다. 우리 할머니여서가 아니라 정말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힘들었던 삶과, 딸에게 짐이 된다는 생각과 이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누구보다도 따뜻했던 나의 외할머니. 그래서 지금도 힘든 날이면 가끔씩 할머니한테 부비며 투정부리던 옛날 생각이 난다. 모질지 못하고 항상 착하기만했던 할머니 품에서, 항상 향긋한 살내음이 나던 할머니 품에 안겨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다. 할머니가 보고싶은 마음과 함께 내가 조금만 더 철이 들었더라면, 할머니와 더 많은 추억을 남길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가장 크다.


그 아쉬운 감정을 마음에 새기고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항상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적어도 스스로의 죽음 한 번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여러 번 경험하게 될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 대해서 미리부터 준비하는 것이 그저 우울하고 슬픈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질문만큼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요즘, 적절한 때에 이 책을 읽게 되어서 행운이었다.


우리 모두는 죽는다. 나도 죽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나의 외할머니처럼 오랜 기간 투병을 하다 죽을 수도 있고, 자다가 죽을 수도 있고,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당장 오늘이나 내일, 아니면 100년이 훨씬 더 지나서. 언제인지 모르지만 무조건 맞이하게 될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 다만 죽음의 모습이 다를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 쌓여 덕분에 행복한 삶을 살았다며 모두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평온히 눈을 감는 죽음은 흔치 않다. 내 죽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적어도 외롭지는 않은 죽음이 되었으면 좋겠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니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만약 오늘이 내 삶이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평소와 다르게 살까? 만약 내일이 내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문득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뭔지, 나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뭔지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 죽더라도 후회가 하나도 없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긴 이미 불가능할 것 같으니, 최대한 후회가 적은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지. 나의 죽음이 아쉽지 않도록,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죽음이 아쉽지 않도록 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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