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독일로 오게 됐나요
7년 9개월의 독일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그간의 삶과 마음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본다. 오늘부터 거꾸로 되짚어갈지, 아니면 첫 단추부터 거슬러 올라갈지 고민하다가 독일 땅 밟던 날의 설렘이 불현듯 스쳐 후자로 정했다.
기억력 나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내가,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는 인생의 몇 장면들이 있다. 2015년 5월 12일 화요일. 입독 3일 차이자 인턴 첫 출근 3일 전, 회사의 로비 소파에 앉아 출근하는 직원들을 구경했다. 그 당시만 해도 정장 입고 다니던 시절이라 넥타이를 맨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다양한 인종의 직원들을 보며 저 멋진 사람들과 같이 일할 생각에 너무 설렜다. 한참을 사람 구경을 하고 있자니 리셉션에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산업스파이로 오해받을까 노파심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자리를 떴다.
"독일에는 어떻게 오게 된 거예요?" 독일 생활 중 제일 많이 들은 질문이다. 나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원래 6개월 인턴 하러 온 건데 어느새 3년째네요", ".. 4년째네요", ".. 5년째네요", .. "7년째네요"
이 단순한 대답 뒤에는 길고 긴 이야기가 있다.
대학에서 팔자에도 없던 독어독문학과를 전공하면서 독일과 연이 닿았다. 대한민국의 많은 수험생들이 그랬듯, 학과보단 학교에 맞춘 결과였다. 새로운 언어에 흥미도 있었고, 타 문과계열에 비해 취업률도 좋다고 하니 why not이었다. 중문, 독문, 불문, 노문의 선택지 앞에 독어를 선택한 이유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독일에서 유학하신 이모를 통해 선진국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또, 입학 후 원래 바라던 상경계를 공부하거나 고시를 치겠다는 요량이었기에, 우리나라와 산업연관도가 높은 독일어가 가장 유용하리라 판단했다. (중국어는 몇 년을 배웠지만 도저히 나와 맞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1학년 1학기. 외고 독어과 출신/독일에서 살다온 동기들 사이에서 아베체데 (abcd)부터 배우려니 큰 동기부여가 안됐고, 더욱이 독일어는 결코 만만치 않은 언어였다. 빠르게 현실 파악을 하고, 졸업학점은 최대한 문학 수업 위주로 채울 생각으로 독일어는 학점 잘 받을 만큼 - 딱 그 정도만 했다. 해야 하니 하는 그 정도..
#1. Euro trip : Hallo und Danke, Das war's
나의 첫 독일은 선아와 함께한 1학년 여름방학 유럽 배낭여행이었다. 베를린, 뮌헨, 로만틱 가도 등 관광지를 위주였다. 베를린에서 독일어 교과서에 나오던 'Linie 100'번을 타며 신기했고, 할로, 당케 정도를 하는 정도였다. 오히려 프랑스, 이태리 같이 아름다운 건축물을 여행하다가 들렸기에 감흥은 덜했다.
#2. München : Die Anfang von allem
마음이 바뀐 건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학과 장학금으로 뮌헨 대학교에서 한 달간 어학수업을 듣게 됐다. 한국에서와 달리, 배운 언어를 슈퍼나 식당 등 실생활에서 사용하니 뿌듯하고 신이 났다. 독일어 1 시험을 위해 달달 외웠던 'Ist hier noch frei? (여기 자리 있습니까?)'를 스타벅스에 써먹었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게다가 책에서만 보던 학생식당 Mensa에 가서 소시지를 먹고, 'super mega giga toll!'을 외치는 금발의 독일어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고, Englischer Garten에 가서 돗자리 펴놓고 누워있는 매일매일이 새롭고 행복했다. 교과서 속 텍스트가 삶이 되는 즐거운 순간들이었다. (여담으로 이 장학금은 성공하신 학과 졸업 선배님께서 지원하신다. 이 어학연수 경험이 없었다면 독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따라서 내 인생길을 바꿔놓은 거나 다름없다. 나도 나중에 성공해서 젊은 친구들에게 긍정적 나비효과를 가져올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다.)
돌아와서 zd도 따고 나름 독일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언어는 B1정도 (초중급)일 때 제일 재밌다. 아베체데 떼던 내가 문장을 구성해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의사소통을 하니 성취감도 제법 있고, 몇 달 더 공부하면 B2, C1에 다다를 거라 꿈꾼다. 그러나 그 이상의 실력 향상은 더뎠고 바쁜 학내외 활동에 치여 독일어는 제자리였다. 이중전공 학점관리에 동아리 학회 과외 알바 봉사활동 영어공부 등 빡빡한 일정에 독일어는 그저 마음의 짐으로 전락했다. 영어 하나라도 잘해야겠다 싶기도 했다.
#3. Hannover : meine zweite Heimat
그러던 중 4학년 1학기 독일 하노버로 교환학생을 갔다. 경험 지상주의자인 나는 대학생의 특권 교환학생은 꼭 경험하고 싶었다. 어학연수가 아닌 독일 대학생들과 수업을 들어보고 싶었다. 독일 대학은 학비가 무료나 다름없기에 한국에서 등록금을 내고 독일 대학으로 교환학생 가는 것은 비합리적 셈법이지만, 돈 주고 살 수 없는 경험이라 생각했다. 또 남들은 취업준비를 시작하는 시기라 불안감이 상당했지만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괴테의 말을 굳게 믿으며 간 세 번째 독일행이었다.
뮌헨에서의 한 달은 그저 맛보기였다면, 하노버에서의 한 학기는 내 삶에 대한 시야를 터준 더 큰 경험이었다.
•일상 속 스포츠부터 요리까지 다양한 활동
•타인에 대한 관대함과 개성 존중
•강요보다는 자율적 책임
첫째, 국내 대학생활 중 많은 인간관계가 술자리로 이뤄졌던 반면, 독일에서는 술 말고도 같이 할 수 있는 활동이 많다는 걸 배웠다.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이 모여 있다 보니 더욱 다채로웠다. 학교 앞 가로수를 따라 자전거를 타거나, 같이 베이킹/요리를 하고, 학교 앞 잔디밭에서 바비큐를 했다. 백조가 노니는 호숫가를 따라 아침 조깅을 할 때, 맞은편 사람에게 Morgen 아침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낯선 이에게 도 ‘Tschüss (잘 가)’라고 인사하는 참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둘째로, 타인의 개성을 존중한다. 차림새도 다들 수수하고, 화장을 하건 말건 살이 찌든 말든 (교환학생 가면 다 10킬로 찌는 거 아닌가요..?^^; )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자유를 느꼈다. 한국에선 항상 다이어트를 입에 달고 살고 꾸미기 좋아했는데, 여긴 이렇든 저렇든 큰 피드백이 없어서 신선했다. 물론 이방인이란 점도 있지만 확실히 개인을 존중해주고 정말 친한 사이가 아니면 외적인 것을 지적하지 않는다.
* 이와 관련, 최근에 재밌는 사례가 있었다. 얼굴 피부가 뒤집어진 채 회사에 갔다. 피부가 좋은 편이라 불긋한 자국은 누가 봐도 눈에 확 띄었다. 재밌게도, 얼굴을 맞대고 대화 나눈 사람들 중, 외국인들은 시선은 분명히 스쳤지만 혼자 흠칫하고는 말았던 반면, 한국 분께서 내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이 왜 그래요??"라고 돌직구! 눈에 보이니까 말하는 거고 일종의 관심의 표현임을 알지만 확연히 대조되는 반응이 문화 차이를 보여준다.
셋째로,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에 대한 책임은 개인의 것이다. 일례로 독일 대학은 출석을 부르지 않는다. 기껏해야 출석명단을 돌린다. 혼자 공부하든 수업에 참석하든 학생의 자율이고 그에 따른 시험 결과는 학생의 책임이다.
일상의 패턴이든, 사회적 소통법이든 이렇게 여유로운 삶의 방식도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준 좋은 경험이었다. (어렸기에 편향적으로 미화된 장점만 본 것도 있지만..) 이때부터 독일에서 살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적어도 외국과 관련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해외영업이나 관광공사, 외국계 회사 같은..
#4. Heidelberg : Die Traumstadt
그리고 14년 여름방학, 네 번째 독일행을 택했다. DAAD 독일 학술 교류처 장학금을 통해 Heidelberg 대학교에서 비즈니스 독일어 어학 수업을 들었다. 이때쯤, 독일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고 이를 위해 독일어를 부스트업 하고팠다. 엄마는 내가 독일에 가는게 못마땅했고, 아빠는 혹시나 외국인 남자친구를 데리고 올까봐 걱정했다. 외국인이어도 능력있는 사람이어야한다며.. 넘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 쨌든, 독일에 올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일거라 생각했는데 이 역시 마지막이 아니었다.
괴테가 'ich hab mein Herz in Heidelberg verloren' (하이델베르크에 내 심장을 잃어버렸다. 사랑에 빠졌다)라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에서 사는 건 너무 큰 축복이었다. 동화 같은 도시에서 Hauptstrasse를 따라 수업을 들으러 가고, 수업 끝나고 친구랑 Alte Schloss에 올라가 벤치에 앉아서 숙제를 하는 등 꿈만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독일어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외국어를 배워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나 자신이 그렇게 초라하고 바보처럼 느껴질 수 없다. 모국어론 나름 똑똑한 사람인데,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초등학생 수준의 단순한 말이거나 그나마도 횡설수설이다. 유럽 애들은 문법 다 틀려도 거리낌 없이 내뱉어서 말이 금방 느는데, 실수 싫어하는 나는 여전히 말이 더뎠다. 마침 한국인도 나 혼자라 독일어를 원 없이 할 수 있는 환경이었고, 어학 집중하겠다고 한국의 가족과 친구들과도 연락을 자제했지만 맘처럼 늘지 않아 속상했다. 하루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수지한테 전화를 했다. 보따리 터지듯이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면서 했던 말 "정말 다행이야. 나는 정말 내가 바보가 된 줄 알았어. 한국말하니 멀쩡해서 너무 다행이야."...
"Ich zweifelte, ob ich so dumm bin. Ernst. Es ist zu extreme aber nachdem ich von Fremdsprache bombadiert wurde, habe ich Konfidenz und Optimismus verloren. Nach der 8 Stunden Pain von Idiot Sein habe ich sofort Suji angerufen. Ich hab fÜr eine Stunde auf Koreanisch gesprochen. Ich fuhlte mich, als ob ich ein neues Leben kriege. 장님이 눈을 뜬 기분이었다. Zum Gluck hab ich keine Problem mit dem Sprechen!!!!! Ich bin kein Idiot !!!!! " - 14년도 일기장 발췌. 다행히 수업이 끝나갈 무렵 독일어에 제법 자신감이 붙었다.
독일어 외에도 얻은 게 하나 더 있다.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한 자신감. 아직 경험해보고 싶은 게 많은데, 주변 친구들은 다들 취업준비나 고시에 매진하고 있어 내가 뒤쳐진 게 아닐까 걱정이었다. '나이가 너무 많아서 취업 때문에 걱정이야'라며 반 친구들에게 토로하니, 다들 무슨 소리냐며 뭐든지 할 수 있는 나이라고 성화였다.
"Wenn du willst, kannst du es schaffen!" (네가 원하면, 할 수 있어)
당시 내 나이 고작 만 22살. 그땐 왜 그리 조급하고 불안했는지. 너네가 한국 사정을 몰라서 그래,라고 푸념하면서도 인생을 길게 보면 잘한 결정이다 싶었다. 남과 똑같을 필요 없고 내 인생길 나만의 이야기로 풀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 In Between ...
한국에 돌아와서 인턴 하며 취업준비를 하면서도 독일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 내가 독일이 좋았던 것은 학생/이방인으로서의 여유 덕이었을지 모르고, 사회인으로서 일을 하면 어떨까 궁금해서 인턴을 해보고 싶었다. 세상을 더 경험하고 싶기도 했다.
"나는 세상을 조금 더 경험하고 싶다. 지금 신입사원이 되어 회사에 들어간다고 해도 나는 쓸모가 없거나 꿈없이 일하는 기계가 될 것 같다.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좀 더 시험해 보고 싶고 뭘 좋아하는지 좀 더 고민해보고 싶다. (...) kotra나 관광공사에 가서 해외근무를 하면 좋겠는데, 그러면 결혼하기 힘들거나 해도 유지하기 힘들 것 같다. 대한항공도 괜찮은 타협점이 될 것 같고.. " -2014년 일기에 적힌 그 때의 고민.
그러다가 우연히 독일에 있는 한국 회사에서 게시한 인턴 공고를 보았다. 마침 가고 싶었던 회사였고 인턴 하던 회사와 동종 업계에 직무연관성도 있었다. 화상면접 후 합격소식을 듣고, 고민 없이 우당탕탕 준비해서 떠났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고, 집이고 뭐고 정해진 것도 없이 떠났다. (나중에 듣기로 주로 유럽인이나 유럽에 있는 한국인 유학생을 채용하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국 커뮤니티에 채용공고를 올렸다고 한다. 역시 운칠기삼......)
# 5. Der Himmel
우당탕탕 다섯 번째 독일행. 그게 2015년 5월이다. 만 나이 23살. 그래, 6개월 동안 열심히 글로벌 업무 경험도 쌓고, 그러고 나서 독일에서 구직할지 한국으로 돌아올지 다음 단계를 생각해보자! 는 마음이었다. 이렇게 설렘 반, 걱정 반 안고 떠난 길이었다. 집 구하는 게 쉽지 않아 일단 2주간 zwischen으로 wg에 있으며 집을 찾아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함 그 자체다. 지금 나에게 집도 절도 없는 타국에 가서 똑같은 시작을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할 테다. 그때는, 그저 젊은 날의 치기인지, 열정인지 뭐든 부딪히면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집도 구하고 잘 적응했으니 하면 되는 게 맞긴하다.
첫 출근 날, 면접용 스탠더드 검은색 정장 재킷과 치마에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고 검은색 5cm 굽의 구두를 신고 갔다. 내 매니저는 이태리 사람이었고, 주재원 세분이 계셨다. 팀원분들도 좋고 다들 잘해주셨다. 인사팀에서 인턴 모임을 주관해 다른 팀 인턴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회사에 비슷한 또래에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한국인 언니 두 명이 있었다. 또, 운이 좋게도 친한 대학 동기와 후배, 또 교환학생 때 만난 친구가 같은 도시에 살아서 정을 붙이고 지낼 수 있었다. 사실 인턴 치고 업무강도가 높았고 한국만큼 야근도 많이 했지만, 업무적으로도 많이 배웠고 영어도 늘어 6개월 더 연장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취업의 고배를 마시거나, 입사했을지언정 수직적 문화로 힘들어하는 친구, 선배들을 보며 많은 고민을 했다. 지금은 한국 회사 근무환경이 좋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회사에 따라 구시대적인 관행들도 제법 있었다. 그러다 보니 번듯한 대기업을 다니다 퇴사하고 독일로 오는 지인도 있었다. 특히 사회초년생이었으니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덜컥 겁이 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독일에서 커리어를 어느 정도 쌓고 근무환경이 낫다는 외국계 기업으로 가는 방법도 생각했다.
이래저래 잘 풀려 같은 회사에서 계속 커리어를 쌓게 되었다. 쉽지만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많이 배우고 성장했다. 운이 좋게 여러 팀을 거치며 다양한 범위의 업무를 경험할 수 있었다. 한국 방식의 업무, 현지 방식의 업무 골고루 경험하고, 다양한 배경과 국적의 직원들과 일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내가 독일에 다다르게 된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봤다. 이렇게 되돌아보니 일직선이 아닌 굽이굽이 한 길이었다. Day 1부터 나는 독일에 평생 살겠다는 확고한 목표로 온 것이 아니고, 우연과 선택의 합작으로 독일이 나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는 말이 더 맞겠다.
얼마 전 유 퀴즈에서 다비치 강민경이, 누가 와서 너 얘랑 20여 년 같이 일해야 해라고 했다면 못했을 것 같지만 뒤돌아보니 20년을 했더라 라는 말을 했다. 나에게 독일도 그렇다. 2015년 5월에 짐을 싸던 나에게, '너 독일에서 근 8년을 살게 될 거야'라고 했다면 선뜻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루하루를 쌓아왔고 많은 고민과 선택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고 되돌아보니 8년이란 시간이 모여있게 됐다.
인생에서 명확한 목표를 갖고 사는 것 좋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대략적인 방향성을 갖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오늘의 나는 여전히 그 방향을 원하는가 재단하면 된다. 최근 몇 년간 나는 한국과 독일 사이에 많은 고민을 했다. 애초부터 언젠가 한국에 돌아간다는 계획은 확고했고 다만 언제 돌아가는 것이 최적점인가가 문제였다. 그렇기에 항상 한국과 독일을 저울질하며 살아왔다. 항상 독일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아쉬움'이었다. 회사에서도 주기적으로 새로운 업무를 맡았기에, '업무적으로 더 배울 수 있을 것 같은데?', 회사 밖에서도 '여기는 가보고 싶은데?', 지금 떠나기엔 너무 놓치는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인생의 우선순위와 원하는 바가 달라졌기에 아쉬움이 없다. 여전히 내가 배울 점, 경험할 것, 갈 곳은 무궁무진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들이 한국에 있기에 ‘아쉬움’은 이제 없다. 그래, 아예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조금 있지만 감수할 수 있다. 어렸을 때는 욕심이 많아, 내 몸이 두 개여서 하나는 한국에, 다른 하나는 독일에 두고 원할 때마다 왔다 갔다 하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아니면 봄여름은 독일에서, 가을 겨울은 한국에서 보내길 바랐다. 그렇지만 이제는 인생에 모두 다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선순위에 따라 내려놓을 줄 아는 것도 지혜라는 걸 잘 안다.
예전에 오빠가 물어봤다. 한국에 휴가 왔다가 독일 내 집에 가면 ‘집’에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어?라고.
그에 대한 내 답은 “새는 하늘을 훨훨 날 때가 있고, 둥지에 돌아올 때가 있다. 독일은 하늘, 한국은 둥지 같은 곳. 그 둘은 서로 대체할 수 없어.”
이제 이 새는 8년간의 비행을 마치고 둥지로 돌아간다. 아니다, 이 새는 독일 하늘에서 한국 하늘로 옮겨갈 뿐. 둥지도 하늘도 있는 한국으로!
15년도 일기장에서 발견한 유물. 설레고 맘이 급할 때 나오는 나의 초딩 글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