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은 명작을 낳는다
귄터 그라스의 책 양철북을 영화화 작품에 대한 비평문. 그동안 멀리 산다는 핑계로 국내 사회 문제를 깊게 고민하지 않았기에 뜨끔했다. 물 흐르듯 누구보다 소시민적으로 살고 있는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아 부끄럽다. 얼른 캐치업해야지!
글을 시작하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지만 양철북에 대해서는 유독 무슨 말로 시작해야할지 모르겠다. 이 영화를 그만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확실히 우리가 이제껏 봐왓던 영화와는 다르다.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을 만큼 지나치게 적나라한 장면들이 가득하다. 영화란 관객이 보라고 만드는 터인데 보기 싫어질 정도로 자극적인 장면을 담은 이유가 궁금할 지경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사라지지 않던 불편함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어린이 오스카에 있다. 만약 양철북이 성인들로만 구성된 영화였다면 불쾌함이 이렇게 극에 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스카가 정신은 성장할지라도 겉모습은 세살배기 어린아이일 뿐이다. 아무리 요즘 아이들의 순수성이 옛날 같지 않더라도 여전히 아동은 세상의 더러움과 추악함으로부터 보호받아야하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오스카가가 무차별적으로 끔찍한 현실에 노출될 뿐 아니라 손수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보는 이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그렇다면 왜 관객에게 괴로움을 선사하면서까지 어린 아이를 참담한 현실의 중심에 세워두고 영화를 전개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오스카의 성장이 멈춘 것은 우연한 사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의 의지와 결정에 의한 점이 눈여겨볼만 한 대목이다. 이 설정을 통해 고장 세살짜리마저 환멸감을 느낄 만큼 현실이 부정했다는 것을 강력하게 전달하는 효과가 있다. 또한 끊임없이 아이를 잔인한 현실에 내던져 놓은 후, 아무리 강한 충격에도 소름끼치도록 담담한 오스카의 반응을 보여주며 또 다시 현실이 얼마나 비상식적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어린 아이의 시점을 빌리면서 어른들의 눈높이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꼬집어 내는 동시에, 마치 물구나무서서 보듯 현실을 대하는 시각에 새로움을 더한다. 참담한 현실을 아이의 순수한 목소리로 말함으로써 현실의 아이러니함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그렇다면 오스카가 어른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어른이 되는 것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류에 영합하여 세상과 타협하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다. 안타깝게도 주변을 둘러보면 불합리한 현실에 저항하는 어른보다는 소시민적 태도로 일관하며 '원래 세상 일이 다 그런거지'라며 방관하고 무관심한 부류가 대부분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세상의 흐름에 무엇이 잘못됐는지 파악조차 못한 채 '옳소!'하며 동조하는 어른도 수두룩하다. 영화 속에 나타나는 얀과 마체라트는 이 두 유형을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 양철북의 배경은 일상적인 부도덕 이상의, 인류 역사상 큰 오점으로 남은 나치즘이 꿈틀대던 시기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얀은 나치즘에 대해 무관심하고 마체라트는 나치즘에 열광한다. 반면, 오스카는 성장을 멈추었고 그에 따라서 두 인물의 행로 모두를 거부하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그 역시 기형적인 형태다. 이는 불구적인 시대 상황 속에서 정상인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이 영화는 2011년 현재에도 유효한 이야기를 던져준다. 우선 나치의 행각을 히틀러와 그를 둘러싼 나치당의 잘못으로만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던 얀과 마체라트 같은 소시민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이 점에서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과 윗세대의 맹목적인 여당 혹은 야당 지지 등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오늘날, 우리 모두 얀과 마체라트가 되는 과오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또한 이 영화가 나치의 잔재 청산을 목표로 했던 뉴저먼시네마임을 고려하면, 5.18 광주 항쟁과 군부 독재의 내용을 제외한 국사 교과서가 논의되고 친일파의 후손들이 기득권 계층으로 살 수 있는 나라에 살면서, '저 영화는 남의 나라 얘기네. 그것도 몇십년도 더 된 과거 이야기!'라고 가볍게 넘길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영화는 현실을 직설적이면서도 더욱 잔혹하게 그려내어 영화를 관람한 것이 아니라, 영화에 시달렸다는 편이 더 맞겠다. 현실을 일말의 미화 없이 표현한 그의 방법이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과거를 혹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재를 다시 한 번 돌이켜볼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 박수쳐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