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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역가 마담 리 Nov 29. 2023

소울푸드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베트남 쌀국수집 테-반에서.

소울푸드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가끔 몸보다는 마음이 헛헛해졌을 때 훌쩍 들르는 집은 베트남 식당이다. 언제나 단정한 와이셔츠를 입은 사장님은 늦은 시간에 백팩을 매고 쓰윽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에게 이렇다 할 말을 붙이지 않아서 좋다. a4용지에 인쇄된 메뉴판을 열심히 읽는 척하다가 늘 먹는 쌀국수 중짜와 사이공 맥주를 주문했다. 맥주병에서 황금색 용 한 마리가 꿈틀거렸다. 이곳에 오기 전 재미삼아 읽은 내년 토정비결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목마른 용은 뜻을 이루 못한 자를 의미합니다.” 올해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피곤한 인간 용 한 마리가 지금 이렇게 허름한 동남아시아 식당에 혼자 앉아 황금빛 용이 그려진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켠다. 밤 열 시가 가까운 시간. 하얀 종이를 덮은 식탁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앉아 있다. 지난번처럼 출입구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물고기가 보이지 않는 수족관과 벽에 붙은 이국적인 사진들을 바라보면서 국수를 기다린다. 사진 속에서 키 작은 베트남 여성들이 차밭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찻잎을 따고, 어떤 사진에는 바다 위에 나무배 한 척이 덩그러니 떠 있다. 바다는 푸르고 닻은 누렇게 바랬다. 쌀국수가 나오고 나는 오늘의 첫 끼를 달게 먹는다. 혼술이고 혼밥이고 평화롭다. 허름해서, 말 붙이는 사람이 없어서, 퇴근길 다리를 건너 집으로 향하기 전 발길 돌리기 딱 좋은 곳에 있어서, 단 한 시간이라도 내 앞에 놓인 국수 한 그릇과 맥주 한 잔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어서, 여기가 오늘 밤 나의 천국이다. 

리옹 7구 쌀국수집 테-반.


머리맡에 놓아둔 작품들은 대부분 소설이고, 주인공들은 무식욕자가 많다. 삶의 질이라든지 인간과 인간이 맺는 구질구질하고 끈적하면서도 소중한 관계 따위에는 도통 무심한 <소립자>의 분자생물학자 미셸 제르진스키가 대표적이다. 주로 도심에 있어서 많은 직장인들이 퇴근길에 들러 간편 조리 식품을 사오는 슈퍼체인 <모노프리>에 갈 때마다 미셸 제르진스키는 ‘어떤 시련을 겪으러 가는 기분’이라고 말하는데, 그건 인스턴트 식품의 형편없는 맛 때문만은 아니다. 맛있게 먹었다, 대신 ‘저녁을 해결했다’라고 번번이 말하는 습관으로 봐서 먹는 행위를 향한 미셸의 시선은 경멸내지 비난에 가깝다. 하지만 미셸에게도 행복한 유년이 있었고, 그 풍경 속에는 어린 미셸을 아낌없이 사랑한 할머니와 크림소스 대구 요리가 있었다. 


“아이는 종종 자전거를 타고 들판에 나가기도 한다. 있는 힘껏 페달을 밟노라면, 한없는 행복감으로 가슴이 뿌듯해진다. 그럴 때 아이는 삶이 영원할 것 같은 기분을 맛본다. 어린 시절에 느끼는 그런 영원성은 오래 가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는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한다. 달리는 자전거 양 옆으로 풍경이 천천히 지나간다. 샤르니에는 식료품점이 하나밖에 없다. 하지만 정육점의 소형 트럭이 수요일마다 오고, 생선 장수의 트럭도 금요일마다 온다. 토요일 점심때면 할머니는 종종 크림소스 대구 요리를 해주신다. 미셸은 샤르니에서 마지막 여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소립자>, 우엘벡, 이세욱 옮김)


살갑다거나 인간들 사이의 나눔과 소통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어도 완벽한 고립 무원 상태까지는 이르지 않았던 미셸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 계기는 할머니의 죽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애착 대상을 잃은 인간의 모습을 이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을 나는 아직 찾아보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의 감정, 그것은 슬픔이라기보다 무서움이다. 


“미셸은 아주 작은 발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갔다. 보폭이 기껏해야 20센티미터밖에 안 될 듯했다. 브리지트가 일어서서 그를 따라가려 하자, 마리 테레즈가 손짓으로 그녀를 말렸다. 잠시 후, 그의 방에서 고양이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개가 울부짖는 소리 같기도 한 괴성이 들려왔다. 브리지트는 더 참지 못하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미셸은 침대 발치에 웅크리고 있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그의 얼굴에 어려 있는 것은 슬픔도 아니었고 인간의 다른 어떤 감정도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는 동물적인 공포가 가득 서려 있었다.” (같은 작품)


공허가 느껴질 때 우리는 뜨뜻한 국물을 찾고 한잔 곁들일 생각을 하고, 그리고 또 다정한 사람을 생각한다. 어떤 것으로든 채우고 막아서 그만 쓸쓸하고 싶다는 욕망, 그것은 살아 있다는, 살고 싶다는, 지금 내 앞에 놓인 다리를 건너 저 불빛이 반짝이는 또 다른 세상으로 가보고 싶다는 욕망의 구체적인 신호다. 욕망을 잃어버린 자, 두 번 다시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한다. 


신호등에 걸려 바라본 노트르담 성당. 작은 불빛 어딘가에 우리 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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