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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역가 마담 리 Nov 27. 2023

사람들은 많은 것을 떨구고 간다.

농협 봉투와 런던 가이드

사람들은 많은 것을 떨구고 간다. 지난 수요일에는 폭풍 마감을 끝내고 금쪽이 강아지 코난이와 윗동네 산책을 나섰다. 산책로를 정하는 건 그날 집을 나설 무렵 우리의 마음보, 주어진 시간, 날씨 등이다. 보통은 쏜(Saône) 강둑을 따라 한바퀴 걷고 오는데, 요 며칠 계속 비가 내리더니 강물이 불어 산책길이 툭 끊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언덕길과 아슬아슬한 계단과 12세기 로마 이주자들이 만들었다는 노천극장을 거슬러 올라갔다. 호기심 많은 강아지와 옛날 바위와 계단들을 헐떡헐떡 오르내리면서 가을이 왔다가 저물었다. 사방이 뚫린 데서 바람이 불기 때문에 ‘네 바람의 육교’라고 불리는 구름 다리를 분주히 건널 무렵이면 눈앞에 리옹을 홍수로부터 지켜주었다는 노트르담 성당의 하얀 탑이 보이기 시작한다. 네 개의 바람이 다리를 흔들어서 그런가, 강아지의 종종 걸음은 여기서부터 더 바빠진다. 노트르담 성당 입구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맹인 아저씨가 앉아서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다. 여기가 리옹에서 제일 높은 곳, 널찍한 쟁반을 닮아서 ‘쁠라또’라고도 부르는 고원이다. 딱히 숨이 차거나 힘든 것도 아니지만, 코난과 나는 고원의 벤치에 잠시 앉았다가 간다. 가끔 우리를 관광객으로 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지만, 보통은 눈앞에 펼쳐진 파노라마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내려온다. 시내 중심에는 여전히 차가 많고, 도시 외곽의 공장에서는 오늘도 연기가 힘차게 솟아오른다. 


여기에 사람들은 많은 것을 떨구고 간다. 그날은 농협 봉투 하나가 버려져 있었는데, 고향에서부터 환전을 해온 돈을 다 쓰고 나서 허물처럼 남겨진 봉투를 보니 괜히 목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봉투의 앙증맞은 캐릭터 위로 낙엽이 부질없이 떨어졌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누군가 런던 가이드북을 떨구고 갔다. 런던으로 들어와 파리-리옹을 거쳐 로마로 아웃하는 여정일 것이다. 한번 지나온 도시는 가이드가 필요 없다는 마음에서였을까? 얼굴 모르는 여행자의 결심을 응원한다. 



떨어뜨린 물건이라면, 마리우스의 손수건 에피소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레 미제라블>은 18세기의 프랑스 대서사시가 담긴 대하 역사 소설이라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사랑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20세기 초 민태원은 이 작품을 <애사, 슬픈 이야기>라고 번역했을까. 그런데 눈물은 슬플 때만 흐르지 않는다. 너무 웃느라 눈물 콧물이 빠지는 장면도 더러 이 작품에 등장하는데, 마리우스가 코제트를 만나 첫눈에 반하는 장면, 그녀와 운명적으로 이어지는 장면이 그렇다. 마리우스는 물론 <레 미제라블>에 등장하는 빅토르 위고의 페르소나다. 그래서인지 빅토르 위고는 청년 마리우스의 외모 묘사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당시 마리우스는 중키, 탄탄한 흑발, 이마가 반듯하고 영민해 보이는 미남 청년이었다. 총명하고 열정적으로 보이는 콧불, 진중하고 차분한 분위기 등 오만한가 싶으면서도 사려 깊고 순수한 모습이었다. 입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는데, 붉은 입술과 세상에 이보다 더 하얄 수도 없을 것처럼 새하얀 치아, 그리고 그의 미소! 그가 미소 지을 때면 그의 얼굴이 자칫 풍길 수 있는 엄근진 분위기가 눈 녹듯 사라졌다. 두 눈동자는 좀 작다 싶었으나, 그 눈으로 그는 큰 것을 볼 줄 알았다."


(청년 시절의 빅토르 위고. 마리우스 이야기를 하는 척하면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영감탱이.)


외할아버지와 인연을 끊고 이제부터 혼자 살아보겠다고 큰소리치며 집을 나온 마리우스는 파리 카르티에 라텡 가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하녀방을 하나 얻어 근근이 살아간다.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어도 과외 수업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는 구절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인문대생에게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나보다. 1830년이 저물어가던 어느 날, 옆구리에 책 한권을 끼고 룩셈부르그 공원 근처를 배회하던 마리우스의 눈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모의 아가씨 코제트가 눈에 들어온다.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코제트는 늘 검은 드레스를 입고 아버지로 보이는 백발의 신사(장발장)와 팔짱을 끼고 인적이 가장 드문 오솔길만을 골라 조용히 산책을 하다가 이따금 벤치에 앉아 있기도 한다. 하루, 이틀, 사흘… 이 모습을 나무 뒤에 숨어 지켜보던 마리우스는 살집 없는 ‘검정옷 아가씨’를 짝사랑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노신사와 검정옷 아가씨가 앉았다가 일어난 자리에서 마리우스는 하얀 손수건 하나를 줍는다. 얇고 가벼운 면 손수건에는 U. F.라는 이니셜이 수놓아져 있었는데, 사랑과 망상에 눈이 먼 마리우스는 이건 틀림없이 저 검정옷 아가씨의 손수건이라고, U는 Ursule(위르쥘)의 약자일 거라고, 과연! 그녀의 이름은 외모 만큼이나 아름답다고 확신한다. 그러고는 밤낮으로 변태처럼 손수건을 코에 대고 킁킁거린다. "아, 위르질 아가씨는 향도 참 좋지~! 손수건에서 심지어 위르질 아가씨의 영혼 냄새가 나는 거 가타. 크아, 순수한 영혼의 냄새!” 하믄서. 마리우스의 착각과 달리 손수건의 주인은 장발장, U. F는 당시 장발장이 쓰던 가명 Ultime Fauchelevent(윌팀 포슐르방)의 이니셜이었다. 훗날, 코제트와 연애를 시작하게 된 마리우스는 본인이 가슴에 품고 잔 손수건이 사실 미래 장인어른이 될 장발장의 것이었음을 알고는 경악하는데, 이 장면은 마리우스에게 마음을 주어버린 코제트의 모습에 배신감을 느끼며 치를 떠는 장발장의 서사와 함께 <레 미제라블>을 낭만주의 서사의 걸작으로 만드는 데 한몫을 한다. 장발장은 수양딸 코제트를 사랑했던 것이다. 

(장발장, 코제트, 그리고 마리우스. 마리우스의 등장으로 장발장은 질투의 화신이 되고 수양딸을 향한 본심을 확인하게 된다. 아,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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