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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현복 Aug 11. 2023

그래서 나는 미술로 도망친다.

사라진 기억(The silent news)_29x21cm_newspaper_2011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글이 싫다. 아니 정확히는 활자가 싫다. 어렸을 적부터 난독증이 있었다. 내가 가진 특유의 시각적 예민함 때문에 활자 그 자체가 생긴 형태의 모양(여러 기하학적인 틀과 각진 획들로 이루어진)이 상당히 거슬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긴 혐오감은 알파벳은 조금 덜 하지만 한글은 물론이고 한문은 더할 나위 없었다. 백색 배경 위에 검게 구불거리는 활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상하게 구역질이 났었다. 그 뜻을 읽고 해석하기 전에 거부감이 먼저 든다. 성인이 되어 글을 읽고 작성하는 지금도 티를 낼 순 없지만 마찬가지로 좋은 느낌은 아니다. 물론 전통적으로 한글이 가진 조형미와 고유성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호불호에 대한 것은 개인 취향의 문제이다.


 텍스트라는 측면에서 글은 기호고 개념의 상징이자 지시이다. 내가 거슬리는 부분은 그게 지시적이라는데 있다. 그 누구도 어떤 글을 본다면 내용에 대한 해석의 지시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전혀 뜻을 알 수 없는 외국어가 아닌 다음에야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외국어에 대한 이유 없는 호감을 또는 비호감을 갖기도 한다. 활자가 가진 조형미 그 자체로만 느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치 구불구불한 뱀처럼 생긴 아랍어나 히브리어등의 조형미에 빠져 그 언어를 배우는 경우도 있고, 특정 국가 활자들의 생김새 때문에 왜곡된 편견과 차별적 인식을 갖기도 한다. 그와 비슷하게 영어 필기체 글씨는 문화적 낯섦에 기인한 장식적 심미성 때문에 광고나 디자인등의 매체에서 꾸밈의 형태로 많이 활용되었다.(2000년대 초중반 뜻 모를 작은 영어 필기체 문단이 잔뜩 들어간 쇼핑몰 상세페이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이런 글의 지시적 특성과 고유의 조형성이 내 취향에 탐탁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과도한 해석일지 모르지만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 그 자체에도 잠재적 폭력성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말을 내뱉을 때 상대방의 귀에 어떤 식으로든 들리게 되어있고 그것은 직선적이고 일방적인 언어 전달이다. 아무 의미 없는 혼잣말은 그렇지 않다 할 수 있겠지만 소리로서 내뱉는 순간 그것은 누군가의 귀에 들리게끔 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일 수밖에 없다. 혹시 학창 시절 이른 아침 주방에서 덜그럭 거리는 엄마의 그릇 소리에 짜증을 내며 일어난 적이 있는가? 소리가 언어가 되는 순간이다. 우리 엄마는 방에 들어와 실랑이하며 나를 깨우는 대신 일부러 큰소리를 내어 깨우려는 의도였고 나는 그 의도가 너무 잘 들려 짜증이 났다! 


 더군다나 소리 없는 글도 소리처럼 들리는 민감한 나로서는 글을 통한 작가들의 시선 공격 역시 미필적 고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글이 칼이 되어 상대를 찌르는 수단이 된 것은 산업화 이후 두드러진 특성이다. 생각을 언어로 옮기고 언어가 정보가 되어 여러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것이 글의 정의라면, 비약해서 그저 '말 많은 수다쟁이 7살 소녀'와 무엇이 얼마나 다르고 그렇게 큰 차이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글을 던질 뿐이지 받는 사람은 고려하지 않는다.

 

 디지털 시대가 고도화되면서 이렇게 텍스트는 소음이 되었다. 이제는 통화보다는 카톡을 주고받고 유튜브 영상 속에도 자막은 필수다. 페이스북, 인스타에도 수십 개의 키워드를 붙인다. 각종 뉴스기사와 블로그, 심지어 그림과 텍스트가 합쳐져 더 자극적이고 지시적인 밈들은 어떤가. 글을 무기 삼아 사람하나 골로 보내는 건 일도 아닌 조용한 폭력은 또 얼마나 많나. 받고 싶은 이가 보낸 보고 싶은 메시지 보다 무명씨들에 의한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광고와 텍스트들의 난입은 눈을 씻고 걸러 보아야 한다. 그렇게 어느샌가 핸드폰 속 쓸데없는 텍스트들은 화면을 차고 넘치다 못해 흘러내릴 지경이다. 사람들은 더욱더 조용하게 글로 소리를 지른다. 이쯤 되면 활자들을 받는 입장에 싫어하지 않는 게 힘든 수준이다.


 그럴 때 나는 미술로 도망친다. 아무 의미 없는 선과 색이 좋다. 구체적인 구상이나 재현을 위한 미술이 아닌 추상적인 표현주의 미술이 특히 좋다. 그들에게는 설명 없는 자유가 있다. 그들에게 무엇을 전달해야 할 의무도 없고 무엇이 되어 상징해야 할 의무도 없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산을 산으로 묘사하거나 물을 물이라고 지시해야 할 관념 따위는 필요 없는 것이다. 바로 내 눈앞에 체험하는 산과 물은 설명해야 할 이유가 없듯이, 체험하는 예술 역시 설명해야 할 이유가 없다. 오로지 느낌을 통한 체험만 있을 뿐이다. 또 그림은 그것을 그리는 사람이 가장 먼저 본다. 그렇기에 미술은 무기가 될 수 없고 전달에 의무도 없다. 누군가는 이미지로 시선을 뺏을 목적을 삼을 수 있지만 그것이 미술의 주된 목적은 아니다. 시선은 돌리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오히려 그저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원초적인 본능이나 감정을 담은 노래가 볼 수 있게 시각화된 것에 가깝다. 순수미술은 또한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를 유쾌하고 감상적으로 승화시킨다, 이보다 명쾌하고 신사적인 의사표현 수단이 또 있을까? 상대에게 어떤 제한도 없이 허용적이면서 자유로운 해석을 열린 마음으로 제공하는 것은 미술 말고는 어느 분야도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고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지만 순수미술만이 가진 유일하고 고유한 장점이자 위대함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미술로 도망친다.


사라진 기억(The silent news)_44x20cm_newspaper_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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