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헬은 늘 성급해)
오래 전부터 가발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가늘고 힘없는 내 머리카락은 수십 년간 뽀글이 파마로 그 정체를 숨겨왔으니까.
수증기와 화기 그리고 온갖 음식 냄새가 가득한 주방. 내가 사랑하는 주방의 상황은 가뜩이나 가엾은 나의 머리카락을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머리에 신경 쓸 시간조차 아까워 까까머리 같은 솟커트로 십수년을 지내기도 했다. 젊었을 때는 짧은 머리도 봐줄만했으니까. 그러다 오십대에 접어드니 숏커트에서 탈출하여 나이에 걸 맞는 우아한 중년의 여인으로 거듭나고 싶어졌다.
머리를 기른 후 어쩌다가 외출을 하거나 주일 전 날, 나의 머리는 전투태세에 진입한다. 정성과 진심을 다한 우아함을 뽐내기 위해. 샴푸를 한 후 적당히 말린 여린 머리카락에 무스와 스프레이를 잔뜩 뿌리고 롤로 머리카락 전체를 꼭꼭 만다. 그리고는 스카프로 고정시킨 후 푹신하고 넓은 베개를 베고 밤을 보낸다. 처음엔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배기고 아파서 베개에 코를 박고 잠을 청하기도, 날밤을 세울 때도 많았다. 허나, 다음날 아침의 우아한 스타일을 위해, 그리고 ‘아무개는 머리도 잘 만져’라는 칭찬이 싫지 않기에 그까짓 고통쯤은 참을 수 있었다.
하여튼 머리만지기 삽 십년 내공은 나를 배반하지 않고 그런대로 잘 유지해왔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감에 부쩍 나의 머리카락은 점점 더 기력이 쇠하여지자 모자로 가릴 수밖엔 별 도리가 없었다. 뱃살은 넓은 옷으로 커튼을 치고 머리는 모자로 가리면서 입꼬리를 귀에 걸고 여전한 듯 눈웃음치며 다녔으니까.
아마 그때부터일 테다, 가발을 생각했던 것이. 잦은 염색과 펌은 내 머리카락 상태에는 치명적이어서 탈모까지 심해졌다. 때문에 가발은 흰머리로 변신하는데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점점 힘들어지는 우아한 머리 만들기 위한 고생과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하지 안 해도 될 테니,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일석이조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모국에 온 후 관심을 갖고 가발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헌데, 문제는 가격이었다. 인모가발은 가격이 수백에서 천까지 된다니 언감생심, 감당하기엔 너무 먼 숫자였다. 그렇다고 인조가발을 하자니 알 수 없는 거부감이 생겼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2년의 시간이 지난 올 8월 둘째 주 수요일 비 오는 날이었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가발가게가 보였다. 무심코 들어가니 사장님은 매우 친절했다. 그리고 가격도 내가 알아본 가격의 반밖에 안 되었으니 이게 왠 횡재인가 싶었으니. 갈 길이 바빠서 인지 아니면 비 때문인지 이것저것 써보지도, 상담도 안하고 십분 만에 결정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약정 데로 가발가격의 반을 계약금으로 지불했다. 현찰로 지불했기에 이십오 만원의 디시(D.C)도 받았으니 기분 까지 좋았다. ‘어차피 해야 할 것 잘 결정 했다’며 일주일 후에 찾기로 했다. 숫자는 숫자일 뿐 기다리는 일주일은 기대감 때문에 마냥 행복했으니까.
설레는 마음과 기대감으로 가발을 찾으러 간 나는 후회막급이었다. 세상에나~~ 상상했던 우아한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가발을 쓴 내 모습에 기가 막혔지만, 첫 번째 드는 생각은 성급했던 나 자신이었다. 사장님은 아름다우시다고 칭찬 일색이었음에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가 거울 속에 낭패한 모습으로 있었으니까. 남이 뭐라 한들 무슨 소용, 내 마음이 아니라는데.
성급함이 문제였다. 생각해보고 또 고민해야했는데 너무 급한 결정이었다. 전에도 여러 번 나의 성급함 때문에 후회할 때가 있었다. 사람들과의 관계나 금전적인 문제에서도 나의 성급한 판단은 마음의 상처와 함께 금전적인 손해로 나를 당혹하게 할 때가 여러 번 있었으니까.
실수는 내가 했기에 손해를 보는 일은 당연했다. 가발에 펌과 커트를 했기에 재판매도 어렵단다. 결과는 십오만 원짜리 인조가발과 계약금을 퉁 친 후 가게를 나오면서 등을 토닥인다. 괜찮아, 괜찮아 다음부터 다시는 이런 실수 하지 않으면 된다고. 사장님의 기분도 언짢음이 역역했기에 가발 쓰는 법도 보관법도 설명해 주지 않고 박스를 내밀뿐이다. 나는 그저 죄인의 자세로 사과를 하고 묵묵히 돌아와서 너튜브를 검색한다, 쓰는법 스타일링 그리고 보관법을 숙지하면서.
가발의 유혹은 가슴을 치는 자책과 금전적 손해로 막을 내렸다. 한 푼도 못 버는 백수가 황금보기를 돌같이 여긴 교만과 성급함의 결과에 백기를 들고 공중에 헛웃음을 퍼트린다. ‘성급함이여 그대 이름은 패망’이라며 나를 책망하는 씁쓸한 8월.
말을 할 때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결정 할 때는 세 번 이상 생각하고 고민해서 결정하자고 다시 한 번 각오를 가슴에 새긴다. 그나저나 저 고가(高價)의 가발은 언제쯤 세상에 선을 뵈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