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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를 노래

(라헬, 그 노래는 제발 하지마세요)

by 강 라헬



해질녘, 어스름을 잔득 머금은 무거운 공기가 싫다. 그것 때문에 느껴지는 미묘한 불안감은 화(火)를 빙자한 외로움으로 나를 와락 덮치기 때문이니까. 간혹 불안감은 어쩔 줄 모르는 그리움으로 변하기도 한다. 긴긴 밤, 무서운 줄 모르고 하얗게 지새는 날들의 행진은 수 십 년째 계속되어 지금 여기. 계절에 관계없이 어스름의 얼굴을 한 해질 녘 하늘은 언제나 나를 초라하고 처연하게 한다.


나의 역사는 ‘누구나가 그러하듯이’ 출생과 성숙의 시간들이 흘러 나만의 우주를 만나게 된다. 그 후 사랑의 완성이라는 결혼도 하게 되는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은 계속된다, 태평양건너로 던져지기도 했지만. 그런데 남들도 다 하는, 아니 겪는 일들을 왜 나는 눈물, 콧물로 온몸을 범벅 칠 하며 노래를 불렀을까. ‘나는 어떡하라고’,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를 열창하면서.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로 시작한 후렴구는 ‘여자의 일생’을 지나 마지막에는 ‘누가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도 성에 안차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으로 끝내기도 여러 번. 그럼에도 아쉬워 남의 염병이 내 고뿔보다 못하다면서 잘 부르지도 못하는 못 다한 노래들을 목구멍에서 피 터지도록 지금까지 부르며 열창한다.

맞다, 이것이 이제껏 살아온 내 시간들의 한 부분이기도하다. 그래봤자 변한 것도 변할 것도 없다. 그저 시간 낭비였다고 하면 내 자신이 너무 초라 하려나. 허나 상투적 이긴 해도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예까지 왔으니 후회나 자책은 하지 말아야 할 테다. 후회까지 한다면 부모님께 정말 몹쓸 딸년인 동시에 내 자신에겐 더없이 가여운 여인일 뿐일 테니까.


살인적 폭염과 폭우를 견딘 후 내리는 단비, 지난밤부터 새벽을 지나 지금 이 시간까지 숨죽이며 비가 내리고 있다. 덩달아 나도 조용한 숨을 내쉬며 회개라도 하는 모양으로 자판을 두드린다. 이 비는 땅의 모든 생명들에게 희망이 될 터이다. 더하여 내게도 또 다른 의미가 될 듯 온 몸이 파르르 떨리기 까지 한다.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일까. 그 떨림은 야릇한 설레임이며 온 몸 구석구석까지 울렁이게 하니 마치 바람난 처녀의 모양새라 표현해도 과하지 않을 듯.


성숙하면서 드라마의 주인공이고 싶었나보다. 관심이 끌고 싶어서 늘 징징거렸을 지도 모르겠다. 연로하신 부모님의 주책맞은 사랑놀이의 결과로 팔남매의 막내로 세상에 나오게 된 나. 때문에 난 존재도 없이 그저 무늬만 종갓집 막내딸로 성장했다. 무서운 여러 형제들의 사랑과 교육을 빙자한 꽃회초리로 구속을 받으며.

가혹해서 무서웠던 그들은 내가 고등학교 갈 무렵 모두 결혼해서 내 곁을 차례로 떠나갔다. 드디어 나는 자유를 얻었고 ‘오, 필승 코리아’를 외쳤다. 왜냐하면 내 곁엔 딸 바보가 되어버린 칠십 초반의 부모님만 계셨기 때문이니까. 그때 부터였을 테다, 징징대면 부모님은 무조건 내가 원하는 것은 하늘의 별도 따다주실 정도였으니까. 어린 마음에도 지옥이었던 형제들과의 시절을 보상이나 받을 요량으로 노래를 불렀으리라. 그 노래는, 기억 되는 어린 시절을 일절로 시작 되서 몇 절인지 기억조차 못하면서 오늘까지 계속됐다. ‘헤일 수 없는 수많은 날’을 보내고 ‘내 사랑 내 곁에’를 피 터지게 열창하면서.


자유는 얻었지만 부모님을 제외하고는 내 맘대로 되는 것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진학문제를 포함 꿈꿔왔던 백마 탄 왕자와의 사랑이라던가, 현모양처의 꿈, 커리어우먼의 샤프한 모습 등. 희망하던 연분홍 꿈은 그저 꿈일 뿐이었던가. 어쨌든 그 시절의 로망들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난 여태껏 꿈에서 해매이며 오늘도 끈을 놓기가 아쉬워 눈을 꼭 감고 ‘언젠가는’을 흥얼댄다.


징징거려도 괜찮아 라는 문장을 입수했다. 내용은 내게 더없이 안성맞춤인 글이었고 용기까지 생겼다. ‘이 세상에 사연 있는 사람이 너 하나 뿐이냐, 이젠 제발 징징대지마’라고 혹자는 소리 없이 이렇게 말할 때가 많았을 테다. 징징거린다는 것은 자신의 약함이나 감성의 표출이란다. ‘아파, 힘들어, 속상해’를 입 밖으로 내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내가 징징댄다고 세상이 시끄러워 지는 것도 아닌데. 글의 결론은 징징대면 덜 아프다는 것이다. 소리를 내면 덜 아프기 때문에 낸다는 징징거림. 그렇다면 나도 덜 아프기 위해 소리를 냈단 말인가. 허나 듣는 사람들은 꽤나 피곤했으리라.


인생의 늦가을 깊숙이 들어와 있는 지금. 황혼의 자유를 맘껏 누려도 되는 홀가분한 지경에 나는 서있다. 홀가분할지언정 결코 행복하다고, 이만하면 족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상황은 아니지만. 다만 이제까지 징징대며 관심을 받으려고 불러왔던 노래는 이젠 부르지 말아야 할 테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아서, 사랑을 구걸하기 위해 불렀던 수많은 노래들 말이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날들인가. 더구나 일 년에 한번밖에 안 오는 가을이 코앞에 와있다. 울긋불긋 물들어가는 산봉우리를 앞세워 코발트빛 하늘의 뭉개구름, 게다가 노란색 국화와 코스모스의 향기. 가을은 황혼의 내게 기꺼이 선물이길 자처하며 숨 가쁘게 뛰어오는 중이다. 내게 오고 있는 날들에게 함지박 미소를 지으며 ‘Oh! Happy Day' 로 가을을 맞아야 할까.


‘DJ에게’의 첫 구절 ‘그 음악은 제발 틀지 마세요, DJ'처럼 나 역시 이제껏 목 터지게 불렀던 노래들은 부르지 말아야 할 테다. 그 가사들이 가슴을 조이고 나를 위로해 줄지언정 내 인생과 비교하는 실수는 더는 하지 말아야한다.


다만 문장수집가인 내가 그 곱고 아름다운 문장과 낱말들을 내 것으로 만들어 귀한 문장으로 다시 태어나게 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테다. 내가 부를 노래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던가 ‘넌 할 수 있어’ 그리고 ‘거위의 꿈’이지, ‘나 어떻게’나 ‘외로운 사람들’은 아니니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슬퍼서 아름다운 곡조와 가사가 좋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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